우리 고전을 향한 관심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추세다. 널리 알려진 고전은 새로운 번역과 해설로 독자의 시선을 끌고, 생소한 고전은 발굴되어 번역되고 있다. 학계와 출판계에서는 이렇게 고전의 가치를 높여 독자의 지적 욕구를 채우주려고 노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에서도 그런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고려 초기의 최행귀로부터 조선 말기의 신재효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빛내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 33인의 미학사상을 담은 글을 뽑아 번역한 책이다. 우리 고전 가운데 미학과 관련한 대표적인 글들을 뽑아 소개한 책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없다. 물론 어떤 작가나 어떤 시대, 특정 부류의 미학을 소개한 저술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전 시대를 일관된 안목으로 바라보고, 정수라고 할 만한 글을 추려낸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규보, 서거정, 김시습, 허균, 김만중,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 익히 알 만한 대작가들의 이름이 보인다. 그들이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에 대해 펼친 견해들이 작가별로 정리돼 나온다. 미학사상이라고 했지만 중심은 역시 문학이다. 회화나 음악을 다룬 글은 그에 비하면 적은 수다. 문학적 내용이 그만큼 양적으로 풍부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비율은 낮지만 문학에 제한하지 않고 미학사상 전반을 아우르려는 시도를 한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전체 내용을 읽어보니, 우리 문학사나 예술사에서 그 동안 비중있게 다뤄져온 논의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개성적 문학론을 표방한 이규보의 글이나, 사대부의 한시문보다 민중의 민요가 훨씬 우수한 문학이라고 주장한 김만중의 글, 그리고 풍부하고 독창적인 사유를 보여준 박지원과 정약용의 미학사상이 그런 예이다. 정평이 나 있는 미학 자료들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부분은 적절하게 도려내어 정수만을 맛볼 수 있게 돼있다. 그 점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너무 많은 자료에 묻혀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긴요한 자료들을 통해 큰 줄기를 잡아 이해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긴요한 글만을 뽑아 소개했다 해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글만이 수록됐다는 말은 아니다. 최행귀나 김창흡, 김려, 신위 등등 문학이론 분야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들의 글까지도 포함돼 있다. 이 책이 처음 간행된 시기가 60년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들의 글까지 뽑아 논의의 대상에 올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은 보리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간행하고 있는 겨레고전문학선집의 하나다. 북한의 문예출판사에서 ‘우리 나라 고전 작가들의 미학 견해 자료집’이라는 이름으로 1964년도에 처음 간행된 책이다. 사실주의 미학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 북한 학계의 분위기가 반영된 만큼 뽑힌 글도 사실주의적, 민족주의적 내용의 자료가 많다.
일관된 안목이라면 바로 사실주의적 관점이다. 남한에서는 사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고 북한 학계의 저작이 소개되던 십여년 전에 원전 그대로 영인(影印)되어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그 시절 이 책을 구해 독파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학계에서는 비교적 생소하던 김창흡이나 김려 등의 비평을 접하고, 또 우리 고전 비평의 대강을 정리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한편으로 북에서는 이런 종류의 책이 오래 전에 나왔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출간된 지 40년이나 지난 현재,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심도있는 연구가 많이 이뤄졌고, 관련 책도 많이 출간됐다. 하지만 이 책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구현한 책이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자인해야 할 것이다.
전문적인 연구자만이 아니라 미학과 문학,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고전 미학사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선집은 여전히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책이 출현할 때까지 이 책은 고전 미학의 정수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책으로 꼽혀야 할 것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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