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반드시 울려야 한다는 아도르노의 음악적 언어관을 이 신출내기 여배우는 본능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아도르노의 독일어 문장이 언어음악이라고 불리는 것에 빗대자면, 그녀의 북한 말은 탱글탱글한 리듬의 현대 서정시다. 그녀가 첫 키스 직전 “어머, 난 몰라” 하며 수줍어할 때, 이별 앞에서 “동무의 첩으로라도 살겠시요”라고 오열할 때, 관객은 언어의 속살로 빨려들어가며 북한 말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럽게 자각한다.
영화 ‘국경의 남쪽’은 여주인공 이연화 역으로 두번째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 조이진을 통해 관객에게 ‘발굴’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과 깊게 파인 볼우물이 매력적인 스물넷의 이 아가씨는 2004년 중성적인 이미지의 맥주 광고로 얼굴을 알린 후 드라마 조역과 잡지 모델을 전전하다 지난해 영화 ‘태풍태양’으로 본격적인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극중 연인 선호(차승원)의 표현처럼 “성격도 얼굴도 동치미처럼 찡하고 시원한” 신세대 북한 여성을 천연덕스럽게 재현해낸 연기 내공으로 볼 때,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일천한 경력이다.
“MBC 베스트극장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PD분이 안판석 감독님께 저를 추천해주셨대요. 두번째 미팅에서 바로 함께 일해보자고 하시길래 너무 놀라 ‘그래도 대본 리딩은 한 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을 정도였죠.” 조이진의 ‘자본주의 냄새 안 나는 얼굴’에 ‘필’이 꽂힌 안 감독은 대사 한 마디 들어보지 않고 제작비 70억원짜리 대작의 여주인공을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캐스팅했다.
관건은 북한 말이었다. “탈북자 출신 북한 말 선생님과 3개월 내내 붙어다니면서 말투, 눈빛, 표정 등을 연습했어요. 돌배기 아기 엄마인데, 제가 극장 가자, 커피숍 가자 하며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 몰라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도 해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북한 말투가 불쑥불쑥 튀어 나와 놀림을 당한 적도 많아요.” 언어의 기계적 모방에 그치지 않고 낯선 언어의 뉘앙스를 살리며 그 안에 감정과 정서를 빼곡히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강박증’ 덕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기회가 안 생겨 전 운이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참 운이 좋은 애더라구요. 촬영 내내 제 감정과 해석을 전적으로 믿어주신 감독님도 고맙고, 차승원 선배님도 잘 한다, 잘 한다 해주지는 않으셨지만(웃음), 풀이 죽을 만하면 한 번씩 ‘생각보다 괜찮다’고 격려해주셨구요. 북한 사람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에요.”
이번 영화에서 너무 많이 울어 말괄량이 같던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했다는 조이진은 앞으로 로맨틱 코미디를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전 줄리아 로버츠나 리즈 위더스푼처럼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고 상큼하게 만들어 주는 배우들이 너무 좋아요. 앞으로 시나리오가 좀 많이 들어오면 그런 역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대가 너무 큰가?”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국경의 남쪽'은 어떤 영화
평양 만수예술단 호른 연주자 김선호(차승원)는 사랑하는 연인 이연화와의 결혼을 앞두고 행복에 젖어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한에 있는 할아버지와 주고받은 비밀편지가 발각되면서 연화를 남겨둔 채 온 가족이 국경을 넘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정착한 선호는 연화를 탈북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들려오는 건 연화가 이미 결혼을 했다는 소식뿐. 절망에 빠진 그가 남한 여성 경주(심혜진)와 결혼해 차츰 남쪽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선호를 만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국경을 넘은 연화가 그 앞에 나타난다.
‘짝’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등을 만든 MBC PD 출신 안판석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 ‘국경의 남쪽’은 ‘진정성으로 가득한 신파’라는 형용모순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일체의 이데올로기를 거세하고 한 연인의 슬픈 사랑에 촉수를 들이대는 이 영화는 ‘그럴 수 있는’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개연성으로 ‘분단의 비극’이라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에 호소하며, 투박하지만 묵직한 신파의 힘으로 핍진하게 진실에 육박해간다.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동막골’ 등에서 이미 증빙됐듯 관객의 목울대를 쓰라리게 하는 그것은 바로 리얼리즘의 힘이다.
멜로 영화로는 드물게 70억원의 제작비가 든 대작 ‘국경의 남쪽’은 화면 속 북한이 실제 북한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고 성실하게 평양 시가지를 스크린 위에 재현했다.
차승원도 기존의 코믹한 이미지를 벗고 무난하게 첫 멜로 신고식을 치렀다. PD출신이라는 전직을 숨기지 못하는 안판석 감독의 단선적인 내러티브와 직설적 화법이 아쉽지만, 결국 저마다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의 싸늘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두 연인의 애잔한 결말이 두고두고 가슴을 할퀸다. 4일 개봉. 12세.
박선영기자 aureov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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