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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0> 크리스 보닝턴(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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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0> 크리스 보닝턴(1934~ )

입력
2006.05.0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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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딸이 있는 영국에 다녀왔다. 달새는 달만 생각하고 술꾼은 술만 생각한다던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어딜 가나 제일 먼저 등산장비 가게부터 돌아보고 그 다음에 기껏 찾아간다는 곳이 산악문학 도서 코너다. 런던에서 제일 크다는 대형서점에 들어서자 내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벽의 한 면 전체가 산악문학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내가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그 앞에 퍼질러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이자 서점 매니저가 말을 붙여왔다. “특별히 찾는 책이 있나요?” 나는 최종적으로 다섯 권의 책을 챙겨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책이 많은 것 같지만 딱 두 종류뿐이네요. 크리스 보닝턴이 직접 쓴 책과 그에 대한 언급이 실려 있는 책.”

지난 해 영국 여행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런던의 웨스트엔드도 아니고 아일레이의 싱글몰트 위스키공장도 아니었다. 그곳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였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이 암벽 등반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의 감상은? 우리의 인수봉과 선인봉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빠져 나올 때 나는 또 굳이 켄달에 가 봐야 한다고 우겼다. “켄달은 아무 것도 없는 도시야.” 그렇게 항변하는 아내에게 나는 대답했다. “그곳은 국제적인 산악영화제가 열리는 도시야. 그 산악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이 바로 크리스 보닝턴이고.”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이라는 연재가 석 달째로 접어들자 이따금씩 독자들의 메일을 받는다. 그들은 묻는다. “세계적인 산악인들이란 하나 같이 그렇게 요절할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않다. 물론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영웅 신화를 만드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다. 늙은 재니스 조플린이나 체 게바라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이란 존경 받으며 늙어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젊은 날의 영예를 훼손하기는커녕 끝없는 자기혁신으로 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는 사람. 그렇게 늙어가거나 천수를 다한 ‘행복한 산악인’들을 보면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진다.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본명은 크리스찬 존 스토리 보닝턴이다. 1996년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으니 정식으로 거명 하자면 이제 그의 이름 앞에 ‘써(Sirㆍ卿)’를 붙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이름은 여전히 크리스 보닝턴이다. 1934년 영국 햄스테드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중반부터 암벽 등반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그가 택한 진로는 엉뚱하게도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왕립군사학교를 졸업한 이후 왕립탱크여단에 임관하여 3년간 북부 독일에 주둔하면서 군 수색부대의 등산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영국인 최초로 알프스 드뤼 남서필라를 올랐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1960년은 이 군인-등산가 최고의 해였다. 영국-인도-네팔 군(軍)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해 세계 최초로 안나푸르나 2봉에 오른 것이다.

“저는 군 생활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기획, 조직, 지휘, 운영, 그리고 책임 지는 자세. 저는 군대에서 배운 이 모든 원칙들을 그 이후에 꾸린 저의 원정대에 고스란히 적용시켰습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삶을 크게 바꿀 두 번의 결단을 내린다. 첫째는 군인과 산악인 사이의 결단. 그는 주저 없이 산악인의 삶을 택했다. 두 번째는 직장인과 산악인 사이의 결단. 산에만 오르면서 생활을 꾸려갈 수는 없다. 그래서 두 번째 결단이야말로 가장 힘겨웠노라고 그는 실토한다. 하지만 유니레버라는 회사에 취직하여 마요네즈 외판원으로 9개월 동안 일한 다음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내던졌다.

“남은 삶 동안 마요네즈를 팔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대신 저는 ‘직업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했죠. 원정대를 기획하고 조직하고 기업들로부터 협찬을 받아오는 일, 그리고 원정의 결과로 책을 쓰고 사진을 판매하는 일 등을 통하여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식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활동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크리스 보닝턴이 이런 사업을 막 시작하던 1960년대에만 해도 너무도 생소하게 여겨졌던 일들이다. 이를테면 그는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개척 등반’을 한 셈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벤처 사업가’다. 그는 이 벤처 사업에서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단지 아이디어 하나로만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원정을 기획하고, 최고의 산악인들로 원정대를 꾸렸으며, 기어코 그들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치열했던 과정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고 하나 같이 두툼한 하드커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20세기 최고의 원정대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리더십’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강연자로 손꼽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크리스 보닝턴을 ‘성공한 직업 산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의 매력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등반을 즐기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8,000m 이상의 산 14개를 오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크리스 보닝턴은 그 매혹적인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반문했다. “그런 등반이 정말 즐거울까요?” 그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일로 부와 명성을 얻은 행복한 사람이다. 올해 72세가 된 크리스 보닝턴은 아직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살며 틈날 때마다 암벽 등반을 즐긴다. 내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하게 되면 그의 작은 시골풍 별장에 꼭 들러 보고 싶다.

◆ 크리스 보닝턴의 세계 초등기록과 저서들

14권 저서… 작가로도 유명

1960년에 안나푸르나 2봉에 올랐다. 1961년에는 히말라야의 눕체에 올랐고, 알프스의 몽블랑을 새로운 방식(프레니 중앙 필라를 통하여)으로 올랐다. 1963년에는 남미 파타고니아의 파이네 중앙탑에 올랐다. 1965년에는 브루야르 오른쪽 필라를 통하여 몽블랑에 올랐다. 1966년에는 아이거 북벽을 직등했고, 기이한 형태의 바위탑 올드 맨 오브 호이에 올랐다.

1970년에는 안나푸르나 남벽을 올라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시대를 열었다. 1974년에는 창가방에 올랐다. 1975년에는 3년 전에 실패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올랐다. 세계등반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등반이다. 1977년에는 카라코람의 오그리(바인타 브락)에 올랐다. 이 등반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1980년에는 중국 신장성의 콩구르에 올랐다. 1983년에는 인도의 쉬블링 서봉에 올랐다.

그는 직업산악인으로 나선 1966년에 ‘나는 산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를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14권의 산악문학 저서를 집필하였다. 이들 중 ‘안나푸르나 남벽’(1971)과 ‘에베레스트의 나날들’(1986)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에 출간된 ‘산악인들’은 훌륭한 세계 등반사 교재로 쓰이고 있으며, BBC 14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산뿐 아니라 바다, 사막, 극지, 하늘 등 모든 분야의 모험가들을 다룬 ‘퀘스트’(생각의 나무, 2004) 하나 뿐이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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