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가 기업의 기부 행위를 양형에 반영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법원의 관행을 비판하고 나섰다. 최근 삼성, 현대차, 론스타 등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재벌 기업과 외국계 펀드가 거액 기부 의사를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현직 판사의 지적이어서 파장을 낳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설민수(사진) 판사는 2일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자선적 기부를 이유로 한 집행유예 판결의 적절성’이라는 논문 형식의 글에서 “최근 형사사건에 직면한 재벌이나 외국계 자본의 자선적 기부가 사회의 관심을 끌고 있다”며 “이런 행위는 검찰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지만 법원의 일부에도 이미 기부는 ‘죄책 감경(減輕ㆍ줄여줌)’의 조건으로서 깊게 파고 들어와 있다”고 밝혔다.
설 판사는 “집행유예는 구금을 완전한 자유의 형태로 바꿔주는 사면권 행사에 가깝다”며 “기부를 근거로 한 집행유예 판결이 위법하지는 않지만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설 판사는 “기부했다고 집행유예 판결을 하는 것은 일반인이 기부를 면죄부라고 생각하거나, 사법부가 피고인에게 매수됐다고 생각하게 할 우려가 있다”며 “자선적 기부는 재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어 금전적 능력 유무에 따라 형량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설 판사는 “법관이 자선적 기부를 양형의 조건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피고인은 기부해야만 한다는 강제력을 느낄 것”이라며 “피고인은 아직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무죄 추정의 상태이므로 이는 적절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관행은 피고인의 개선이나 기업의 변화, 범죄 예방이나 처벌에도 효과가 없다고 덧붙였다.
설 판사는 대안으로 “기업의 부적절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자발적 기부 대신 보호관찰과 유사하게 법원이 관행 개선 과정을 감독하는 이행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방법이 있다”며 “이 프로그램을 사실상 강요하면 기업들로 하여금 윤리적 경영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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