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이 달부터 현대ㆍ기아차 그룹의 비자금 사용처 수사에 본격 착수했지만 벌써부터 수사가 장기화될 조짐이 보인다. 검찰이 속도조절에 나섰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정상명 검찰총장이 5ㆍ31 지방선거 때까지는 대형 경제사건 기획수사를 자제하라고 당부한 것이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검찰은 물론 “현대차 사건 수사는 (정 총장의 발언과)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2일 “비자금 사용처와 로비의혹 수사는 일정대로 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방선거를 1개월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재벌기업과 정ㆍ관계 인사들이 연루되거나 연루됐을지도 모를 대형사건 수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검찰 스스로 이미 “사용처 수사는 상당히 오래 걸릴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이 말이 단지 수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선거일정 등 외부 요인을 고려한 발언일 가능성이 있다.
사용처 수사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비자금이 무더기로 사용된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몽구 회장의 구속영장에도 글로비스의 비자금 사용처로 불법 정치자금이 언급돼 있다. 선거 전에 정치인의 혐의가 드러날 경우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면 ‘경제 망친 검찰이 선거까지 망친다’는 비난을 살 수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속도 조절을 검ㆍ경 수사권 조정 문제와 결부시키기도 한다. 지난해 수사권 조정 문제로 수세에 몰렸던 검찰은 현대차 수사로 자존심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수사가 너무 거침없이 진행되다보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정 총장이 “현대차 수사로 검찰이 거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만큼 검찰 구성원은 겸손한 자세로 근신해달라”고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다음 달에는 수사권 조정을 논의할 국회 법사위원회가 하반기 일정에 따라 재구성된다. 검찰이 정치권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당장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더구나 개정된 법률에 따라 상임위 관련 자격증을 가진 국회의원은 위원회 합류가 힘들어졌다. ‘검찰 후원자’였던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대거 법사위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불리한 여건을 감안해 속도 조절을 할 필요가 생겼다는 뜻이다.
2004년 대선자금 수사가 검찰의 수사 속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사용처 수사를 하다가 과거 대선자금 수사 결과를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검찰이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