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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홀로 초고층 빌딩의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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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홀로 초고층 빌딩의 폭력성

입력
2006.05.0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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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들의 숲은 현대의 대도시가 얻어낸 새로운 자연이며 스펙터클이다. 물론 이 거대한 이물질들의 지형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정경이다. 한정된 지표면에서 각종 점유의 욕구와 본능들이 서로 부딪던 끝에 순식간에 융기되곤 하는 자본과 기술과 욕망의 퇴적물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일 거다.

● 아래 세상과 격리된 군림의 정서

그래선지 건축의 ‘높이’란 어느덧 그 소유자의 자본적 자신감이나 신뢰감 등을 일반에게 더할 나위 없이 뚜렷이 시사하는(사실 대부분의 경우 포장하는) 유효한 기호로도 쓰이게 된다. 더구나 도시인의 일상에서 높이와 시계(視界)의 확보는 시대의 기술이 선사하는 훈장과도 같은 심리적 경험이다. 초고층 공간은 일시적이나마 하부 세상의 다난함으로부터 우아하게 격리된 듯 한 의식 또는 이에 대해 어떤 군림의 정서마저 제공하는 장치다.

언뜻 봐서 비슷한 초고층 구조물들의 숲 속이지만 경우마다 그 속을 거닐며 겪게 되는 위압의 느낌이나 삭막함의 정도는 큰 폭으로 달라지는 걸 우린 경험케 된다. 이의 주된 이유라면 아마도 그 까마득한 장신들의 하부, 우리의 눈에 가까운 가로들에 면해서는 별도로 얼마나 친근한 스케일과 표정들을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비록 거구의 타워들이라 해도 거시적으로 볼 때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따라 다채롭지만 일정한 형상과 비례로, 마치 꽃다발의 그것처럼, 모여 있을 때 역시 우리 의식의 거부감은 대폭 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초대형 인공 자연이 집합적으로 자아내는 도시적 축제, 즉 이들 특유의 리듬감이나 색상, 낮과 밤에 따른 빛의 변화, 질감, 질서, 정돈의 미학 등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흥미도 적지 않다.

다만 첨예한 도심을 벗어나면서는 무턱대고 건축물 개체의 ‘높이’를 지나치게 발생시키는 일은 예민한 사안이 된다. 현대의 도시는 높이 짓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자랑하듯 이미 아무 곳에나 함부로, 경박하게 그 일을 벌이고 있다.

특히 그 배경에 어김없이 특유의 높은 지형들이 자리하고 있는 우리 도시의 외곽일 경우엔 이런 일이 대개 폭력적인 결과로 이어지며 상흔처럼 남기 쉽다. 이미 고도와 시계를 충분히 얻고 있는 지형에 더해서 더욱 높은 체구를 세우는, 이러한 높이에의 경도(傾倒)는 자칫 근거없는 욕구와 열등감의 천한 발로 이상으로 읽혀지기 어렵다.

● 모두의 자산인 자연풍경 해쳐

도시 언저리의 언덕이나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자연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앞서 말한 바 있는 도시적 점유의 욕구들이 한 숨 놓게 되는 하나의 커다란 여백이기 때문이다.

건축이란 일도 일단 이 여백에 불가피하게 들어서며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도드라지게 되면 인간처럼 아무 옷이나 걸쳐선 곤란할 뿐더러 일종의 겸양의 자태를 여러 모로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모체가 되는 본래의 지형이나 경관이 자신에 의해서 초라하게 위축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개개의 건축물은 누군가의 엉뚱한 자의식의 산물이거나 소유물일 수 있으나 풍경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김헌 건축가ㆍ어싸일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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