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대학들이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새 입시제도가 시행되는 2008학년도 대입 전형에서 학교생활기록부 반영 비율과 관련한 입장을 180도 바꿨기 때문이다. 주요대는 지난해 12월 “학생부 비율을 지금처럼 유지하거나 오히려 낮추겠다”고 밝혔으나 5개월 만에 이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합의안 왜 나왔나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24개 전국 주요 국ㆍ사립대가 2일 발표한 2008학년도 대입전형 합의안은 다분히 교육인적자원부를 의식한 결정으로 볼 수 있다.
학생부 비중을 높이거나 대학별 고사를 최소화해 반영하는 등의 핵심 내용이 모두 교육부가 바라는 내용이다. 교육부의 밀어붙이기식 입시 정책이 일단 효과를 거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국ㆍ사립대들이 함께 모여 이례적으로 대입전형 합의안을 낸 데는 학생부를 대하는 대학들의 인식 변화도 작용했다. 그 동안 대학들에게 ‘학생부=믿을 수 없는 전형 요소’라는 불신이 팽배했지만 올들어 어느 정도 해소됐다.
교육부가 지난해 고교 1년생 4만2,000여명의 학생부를 분석한 결과가 특히 주효했다. 1등급 4% 등 석차등급제 지정 비율을 지키는 고교가 상당수였다.
분석 대상 학생 중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등 5개 과목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은 78명으로 전체의 0.34%에 불과했다. 학생부의 변별력을 확인 시켜주는 대목이다. 2월 서울대를 시작으로 새 대입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이른바 ‘대학 투어’를 강행한 김 부총리는 이런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협력’을 당부했다.
문제는 없나
그러나 학생부 비중 확대 등 합의안 내용이 효과를 거둘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시전문가들도 상당수다. 50% 이상이라는 숫자는 명목 반영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질반영률은 대학이 부여하는 기본점수에 좌우된다. 실제로 내년 대입전형 정시모집에서 학생부 명목반영률은 주요대 대부분이 40%지만 실질반영률은 10% 이하가 태반이다. 서울대 2.28%, 고려대 7.4%, 연세대 11.7%, 성균관대 5% 등이다.
실질반영률이 낮다는 것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논술고사 등 다른 전형요소가 당락을 좌우한다는 의미이다. 이영덕 대성학원 평가이사는 “실질반영률을 감안하지 않은 단순한 학생부 비중 확대는 허수”라고 지적했다.
학생부 비중 확대와 관계없이 주요대는 논술고사 등 대학별 고사에 여전히 매력을 느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학교간 학력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학생부는 신뢰에 한계가 있는 데다 수능 성적도 변별력을 지니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학생부 및 수능 변별력 유지 등 정부의 후속대책이 나오지 않을 경우 ‘대학별 고사는 필요 범위 내에서 최소화해 반영한다’는 합의 내용이 자칫 사문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합의안 마련 과정을 놓고도 뒷말이 나오고 있다. “동의한 적이 없는데도 대학 이름이 들어있다”는 등의 불만이 그것이다.
서울대 관계자는 “이런 식으로 모아놓고 우격다짐식으로 합의하라는 데는 동의 못한다”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한 사립대 입학처장은 “언제 모여서 무슨 논의를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진각 기자 kimjg@hk.co.kr
■ 수험생·교사들 대체로 "예상했다"…특목고 "불리해져"
수험생과 입시담당 교사들은 2008학년도 대입에서 학교생활기록부 반영비율을 50% 이상으로 높이기로 했다는 대학들의 발표에 대해 대체로 '예상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서울 명덕여고 2학년 김한슬양은 "입시 방식이 자주 바뀌는 것 자체에 불편함을 느낀다"면서도 "40%나 50%나 어차피 공부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학력 수준이 높은 특수목적고나 비평준화 고교에선 내신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이경만 대원외고 교사는 "아무래도 내신 반영비율이 오르면 특목고 학생들은 불리해지지 않겠냐"고 말했다. H외고 2학년 이모군은 "지금까지 내신은 중위권에 그쳤는데 과연 논술고사를 통해 '내신 50% 반영'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학교에서 내신 경쟁이 과열될 것을 염려하는 학생도 있었다. 경남 진주제일여고 2학년 장주영양은 "작은 점수 차이로도 친구 간에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는데 앞으로 더 삭막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입시전문가들은 유ㆍ불리를 따지려면 아직 더 기다려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병화 고려학평 평가이사는 "대학마다 반영방법이 달라 단순한 9등급별 점수 부여냐, 일부에서 제기하는 석차 표준점수제의 도입이냐, 일부 교과 영역에 가중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며 "섣부른 자만이나 포기는 금물"이라고 조언했다.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김정명신 회장은 대학들의 내신 비율 상향 방침에 대해 "일단 환영한다"면서도 "대입이 2년도 안 남은 상태에서 대학이 구체적인 입시안을 제시하지 못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박원기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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