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흔히 두 가지다. 앞선 것보다 더 나은 것 또는 그보다 못 한 것. 전자는 세대 교체를 가져올 수 있고, 후자는 잠깐 주목을 받을 수 있지만 생명력이 짧아 금방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판단은 흑백 논리나 이분법과는 다른, ‘우열주의’에서 온 것이다.
나이즐 케네디가 비발디의 ‘사계’ 음반으로 등장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팝 스타인 줄 착각할 정도의 파격적인 재킷 사진, 이전의 음반들과는 너무나 다른 연주 스타일과 충격적인 곡 해석. 그것은 분명 새로운 것이었고 그 앨범은 순식간에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음악계의 평가는 거센 찬반 양론으로 갈라졌다.
그의 연주력을 의심하며 이러한 시도를 비하하는 글이 쇄도했고, 새로움과 파격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옹호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그 뒤에도 베토벤이나 브람스를 그의 스타일로 녹음하며 계속해서 비평가들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올라갔다.
같은 곡을 ‘이 무지치’가 연주한 불후의 명반 등과 비교할 때 “새로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악평들은 그를 뛰어난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글렌 굴드도 그랬고, 바네사 메이도 그랬다. 여기서 잠깐! 그들과 케네디를 비교해도 분명 우열은 있게 마련인데….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들이 죽고 나서 역사가 어떤 것을 ‘진짜’로 판결하길 기다려야만 할까?
젊은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대가 이긴다는 섣부른 판단을 하는 반면에, 선배들은 패기만 앞선 젊은 세대의 미숙한 철학을 걱정하기도 한다. 역사는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설렁탕보다 칼국수가 뛰어난 음식인가?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의아해 할지도 모르면서도 예술에 대해선 그렇게만 질문한다. 설렁탕을 좋아하는 사람이 칼국수를 싫어 한다면 정말 잘 만든 칼국수를 먹어 보지 않아서일 것이다. 음식에서 우열을 따진다면 음식점에서 상위 10개 정도의 메뉴만을 먹을 수 있는 반면, 다양성을 인정하면 수천, 아니 수만 종의 음식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
정통인 ‘이 무지치’의 연주가 크로스오버적인 나이즐 케네디를 능가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를 대할 준비가 되어있고, 그들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더 성숙한 문화라고 믿는다.
새로운 문화는 이전의 문화를 부정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 문화처럼 오랫동안 다져온 깊은 철학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잠재되어 있는 가치를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우리가 전세대에게 그렇게 인정 받길 바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악사중주단 콰르텟엑스 리더 조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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