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바람처럼, 안개처럼, 인적 없는 도시의 풍경 속을 배회한다. 그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절름거리며 걷지만, 시간처럼 빠르고 거대하고 당당하다. 그는 환영인 듯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어떤 시공간의 상처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게 한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그가 스쳐간 도시의 길처럼 선연하고, 환기시킨 기억은 덜 아문 상처처럼 아릿하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8,500원)는 이 여자의 자취와, 여자가 환기시킨 시간과 공간 속의 기억들, 그 기억 속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한숨처럼 고요한 ‘기록’이고, 서사 없이 이어지는 단편적인 글의 모자이크다. 독자는 이 낯선 형식과 시적인 문체를 통해 여자의 실체에 가까스로 접근한다. 눈물과 기억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도시의 길들을 거쳐, 시간의 두께를 뚫고 편력”(63쪽)하는 여자의 실체에.
”그 울고 다니는 여자는 두 가지 세계 사이에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와 과거,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43쪽)
그녀가 환기하는 기억, 그 시간과 공간 속의 세상은 “더럽고 비에 젖은 개털처럼 악취를 풍”(48쪽)긴다. 빵 한 덩이를 구하고자 노란 별(유대인 표식)을 달지 않고 거리를 나갔다가 등에 총을 맞고 숨진 남자, 수용소의 아이, 전쟁과 수난의 상처가 오롯하게 밴 도시 전체, 수십만 수백만의 상처 가운데 하나의 수치와 고통의 상처로 남은 기록사진의 한 장면, 가난과 실연의 고통…. 그녀는 도시에 한 번씩 나타날 때마다 그렇게 상처 입고 쓰러진 존재들의 눈물을, 그 기억을 소리 없는 흐느낌으로 첨예하게 환기시킨다.
“피에 젖은 빵의 맛이 났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그리하여 그것의 빛마저 짓밟아버렸던, 수천 수백만 개 별들이 풍기는 악취들. 혹은 진흙 속에 뒹구는 개털같이 구역질나는 영혼들의 악취일까?… 희생자들의 고통이 정말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가를 알려면, 한 방울의 눈물이 엄청난 무게라는 것을 사람들이 잊지 않으려면, 그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50쪽)
그녀가 거대한 까닭은 그녀가 걸친 누더기 주름 속에 ‘수천 수만 명의 이름들, 얼굴들, 목소리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쩔뚝거리는 것은 “그 무거운 역사의 몸을 떠메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쩔뚝거리며 그들을 품고 다니는 것은,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들을 환기시키는 것은, 바로 그들- 모든 약자들(…) 지상의 거처를 지상의 아름다움을, 하늘과 빛과 바람의 공간을 동시에 다 빼앗긴 채 그 역사로 인하여 죽는 자들-이 역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젖은 개털의 악취 나는 시절이 “결코 아주 지나가버린 것은 아니”고 또 “결코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또 그녀 자신이 이 도시와, 모든 살아있는(던) 존재와 그들이 지나쳐온 시간이 부여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녀는 걷는다.
소설은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모든 기억과 눈물, 삭은 분노와 절망의 다른 이름인 연민의 문장들은 그 여자의 ‘발자국’이다. 소설은 그 여자가 어디론가 떠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는 아마도, 지금 여기 이 도시의 어느 인적 없는 풍경 속을 흔적 없이 고요하게, 소리 없이 흐느끼며 바람처럼 걷고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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