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차장 K(42)씨는 올해 초 새로 분양 받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500만원을 들여 벽걸이형 50인치 PDP TV를 장만했다. 6년 전 구입한 29인치 브라운관 TV도 아직 멀쩡했지만, 새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디지털 TV를 구입한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아들의 카메라폰을 대당 100만원에 육박하는 최신형 MP3폰으로 바꿔줬다. 연말 성과급을 받은 김에 아이들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K씨 가족의 디지털 기기 이용비는 매달 약 40만원. 4인 가족의 휴대폰 요금이 25만~30만원, 유선전화(인터넷 포함) 6만원, 위성방송 1만6,200원 등이다. K씨의 월 수입은 세금을 떼고 월 380만원 정도. 총 가계수입의 10분의 1 이상을 디지털 이용에 지출하는 셈이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과소비’가 심각하다. 특히 저소득층과 10대 청소년들의 디지털 과소비는 빈부격차를 키우고 원조교제 등 성적 비행을 확산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최근 20년간 통계청의 가계소비지출 자료를 정밀 분석한 결과, 1995년 하위 20% 소득계층의 소비지출(74만1,410원) 중 통신비 비중은 2.56%(1만9,040원)에 불과했다. 이는 식료품, 주거비 등 9개 세부 지출항목 가운데 가장 적은 것이다. 그런데 2005년에는 전체 소비지출(118만7,705원)의 8.21%(9만7,538원)로 급증했고, 식료품과 교육비에 이어 세 번째로 비중이 컸다.
반면 상위 20% 소득계층의 통신비 비중은 같은 기간 1.55%(2만9,848원)에서 4.79%(16만1,764원)로 늘어나는데 그쳤다. 85년엔 상위 20% 계층의 통신비 비중(1.84%)이 오히려 하위 계층(1.17%)보다 높았다. 시간이 갈수록 소득수준을 뛰어넘는 디지털 과소비가 저소득층 가계를 압박, 양극화 확대의 주원인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지난해 하위 20%의 월평균 경상소득은 112만원이었다. 한달 수입이 상위 20% 계층(585만원)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저소득층이 휴대폰과 인터넷 사용에 소득대비 3배 이상의 과소비를 하는 셈이다.
국제 비교에서도 한국의 디지털 과소비는 뚜렷하다. 우리나라 가계비 중 통신비 비중은 6.3%로 OECD 평균(2%)의 3배를 넘었다. 한국 가정의 한달 통신비는 평균 120.7달러로 OECD 국가 중 단연 1위다. 유별난 첨단 디지털 제품 선호 탓에 국내에서 거래되는 디지털 기기는 외국보다 평균 50~60%가 비싼데도, 휴대폰 교체주기는 평균 12개월로 미국(21개월) 러시아(24개월) 캐나다(30개월)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통계청 관계자는 “하위 20% 계층은 소비가 소득을 6만5,000원 초과하는 만성적자 상태지만, 통신비 비중을 95년 수준인 2% 안팎으로 낮출 수 있다면 흑자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조철환·박원기기자 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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