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13일 “우리는 6자회담이 늦어져도 나쁘지 않다. 우리는 더 많은 억제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쳤다. 6자회담 각국 수석대표들이 참가한 도쿄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 기간에 크리스토퍼 힐 미국 수석대표와의 회동을 희망했으나 끝내 불발되자 내뱉은 볼멘 소리였다.
그의 말대로 6자회담이 표류하는 동안 북한은 차후 협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플루토늄 재처리량을 늘릴 것이다. 북한의 핵물질 확보 및 확산 저지를 정책목표로 삼는 미국에는 큰 부담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북한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든 데, ‘억제력’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중국과 남한의 지원으로 조지 W 부시 미 정권이 바뀔 때까지 버틸 수는 있다. 그러나 영양부족으로 청소년들의 키가 남한의 같은 또래에 비해 15㎝ 이상이나 작아지고 매년 막대한 양의 비료와 식량, 에너지를 지원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그런 버티기는 무의미하다.
미국은 느긋하다. 지난해 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ㆍ19 공동성명’이 엉성하긴 하지만 북핵문제를 일정한 틀에 가두는 효과를 내고 있는 덕분이다. 미국은 이 틈에 북핵문제를 제쳐두고 대북 금융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북한 인권문제와 탈북자문제에 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바쁜 와중에 어제 탈북자 일가족과 일본 납치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모친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만났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한껏 이슈화하는 이벤트였다. 금융제재가 북한 김정일 정권에 기대 이상의 타격을 주고 있다는 판단도 미국의 느긋한 대응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과 직접 대면을 회피하면서 외곽에서 금융압박과 인권공세로 아웃복싱을 구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해의 ‘2ㆍ10 핵 보유선언’과 같은 핵 시위 카드는 이제 사용하기 어렵다. 지하핵실험 등의 강수를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 생명줄이 되고 있는 중국과 남한의 지원까지도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선택은 무엇인가. 미국의 압력에 일일이 대응하는 식으로는 승산이 없다. 그보다는 6자회담에 복귀, 과감한 선제적 양보로 판을 주도하는 것이 방법이다. 김계관 부상의 말대로 금융제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6자회담에 복귀하면 미국 강경파의 영향력을 더욱 키울 수는 있다. 그러나 북한이 더 버틴다고 해서 미국 강경파의 영향력이 줄어들리 없다. 오히려 대북 협상파의 입지만 약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양보하고 들어가면 ‘떡 하나 더 주면 안 잡아먹지’식의 또 다른 요구가 이어질 수 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이라크에서 비상구를 찾지 못한 채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부시 정부가 북한의 선제적 양보에 강수로만 몰아가기는 어렵다. 북한의 선제적 양보는 핵문제와 인권문제 등으로 악화일로에 있는 국제사회의 반북 여론의 물꼬를 트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서 핵을 포기하고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얻어내는 과정은 김정일 체제로서는 위험부담이 따르는 선택이다. 그것은 개혁 개방의 길이기도 해서 북한사회 내부의 변화가 불가피하고 이 역시 김정일 체제에는 부담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서 김정일 체제가 생존할 방법은 없다.
문제는 누가 김 위원장에게 이런 리스크 테이킹을 감수하라고 설득할 수 있느냐다. 바로 여기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역할이 필요하다. 6ㆍ15 정상회담을 통해 김 위원장과 상당한 신뢰를 쌓은 DJ라면 김 위원장에게 현재 북한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리스크 테이킹의 불가피성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DJ의 6월 방북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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