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열세 번째 맞는 세계 언론자유의 날이다.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에 위헌 요소가 있다고 과점 신문들이 툴툴거리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언론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언론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또렷하다.
언론 기업이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권력 기관들을 한국에서만큼 자유롭고 무람없이 조롱하고 비방할 수 있는 사회도 많지 않다.
신문법에 담긴 독과점 규제와 경영자료 신고의무, 신문 방송 겸영 금지, 그리고 언론중재법이 언론중재위원회에 부여한 오보 정정 권고 권한 같은 것은 과점 신문사들이 주장하듯 언론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기는커녕 언론시장의 투명성과 공정성, 언론활동의 공적 성격과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자유언론의 버팀대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언론 자유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풀리기 시작한 정치적 태엽의 동역학 속에서 쟁취됐다. 그러니,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5공체제의 제도언론에 만족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에 언론자유가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5공 시절 청와대에서 문공부를 거쳐 내려보낸 보도지침에 고분고분 순응하던 언론 종사자들이 지금 정부의 언론 탄압을 운위하는 것은 희극적이다 못해 역겹다.
정보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던 군사정권 시절엔, ‘고위층’이라 불렸던 대통령이나 그 주변을 슬그머니 건드리는 것조차 금기였다. 신체의 자유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용기 있는 기자들만이 겨우 에둘러 권력을 비판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흔히 ‘고위층’이라 불렸듯, 그 시절엔 사물을 제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일이 예사였다.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 부르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그 시절의 언론은 중공이라 불렀다. 중공은 중국공산당의 준말이다. 프랑스공산당을 불공(佛共)이라 줄이고 일본공산당을 일공이라 줄이고 조선공산당을 조공이라 줄여 부르는 식이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정당 이름을, 비록 그 정당이 일당독재 체제의 지배정당이긴 하지만, 그 나라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그 시절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을 ‘소공’이라 부르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지 못하고 중공이라고 불렀던 것은 대만과의 관계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엔 대만이 중국 또는 자유중국이었기 때문이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대륙을 버리고 타이완섬으로 건너간 국부(國府: 국민정부 또는 국민당정부)와의 반공주의적 유대는 한국인들이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재갈이었다.
유엔에서의 중국 대표권이 타이베이(臺北) 정부에서 베이징(北京) 정부로 넘어간 1971년 이후에도, 한국 언론은 여전히 중국을 중공이라 부르고 대만을 (자유)중국이라 불렀다. 그 시절 초중등학교 지리교과서는 중국의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난징은 국민당이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먼 옛날’의 수도였을 뿐인데 말이다.
검열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땐 고위층 언급도 '금기'
1987년 6월 민주화 물살타고 언론은 제 근육 키워
오늘날엔 경제권력·민족주의가 새로운 '성역'으로
인터넷 마녀사냥 또한 언론의 자유가 내뿜는 악취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러야 했을 정도니, 오늘날 우리가 북한 또는 북측이라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괴’라고 부른 것도 별난 일은 아니었다. 북측은 남측을 ‘남조선괴뢰도당’이라 불렀으니, 그 당시의 남북 언론이 보기에 한반도에는 두 괴뢰정권이 있었을 뿐 독립국가는 없었다. 북한이 나라가 아니었으니, 그 지역의 괴뢰정권이 새로 정한 행정구역을 남쪽에서 인정할 수도 없었다. 학교의 지리교과서에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양강도나 자강도 같은 지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단 이전의 이름만이 언론이 쓸 수 있는 지명이었다.
언론은 권력자의 정적(政敵)을 부를 때도 바른 이름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투옥과 가택연금으로 세월을 보내던 시절의 김대중씨를 언론은 당사자의 이름 석 자 대신 ‘재야인사’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른바 신군부의 5ㆍ17 쿠데타 이후 얼마동안은 김영삼씨도 또 다른 ‘재야인사’가 되었다.
1983년 5월18일 광주사건 3주년을 기해 김영삼씨가 자신의 가택연금 해제를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을 때, 그리고 그 단식이 실제로 김영삼씨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이 됐을 때도, 언론은 이 사건을 ‘정치현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전두환 정권이 김영삼씨의 요구를 들어주고 김영삼씨가 단식을 풀었을 때야, 단식은 단식이 되었다.
김대중씨는 ‘재야인사’의 너울을 벗은 뒤에도 80년대의 서너 해 동안 씨(氏)가 빠진 김대중으로 거론됐다. 그가 ‘극악무도한 국사범’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언론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한 때는 금기였다. (언론이 강력범죄의 당사자나 피의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씨를 빠뜨리는 관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이름 뒤에 씨를 붙이지 않는 관행과는 다른 맥락이다. 한편으로 이해할 만한 점도 있지만,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김대중씨는 1985년 2ㆍ12 총선(12대 총선) 직전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집에 연금됐지만, 이내 국내 제도권 정치의 한 배후자가 됨으로써 이름 뒤의 ‘씨’를 되찾았다.
그 시절 대통령 부인은 반드시 아무개 여사였다. 지금은 대통령 부인을 일컬을 때 ‘여사’와 ‘씨’가 병용되고 있지만, 일부 언론에서나마 현직 대통령 부인을 ‘씨’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씨의 부인 김옥숙씨에 이르러서였다. 이순자씨를 반드시 이순자 여사로 불러야 했던 시절, 영부인, 영식, 영애라는 말도 의미의 변화를 겪었다.
이 말들은 본디 남을 높여서 그의 부인, 아들, 딸을 일컫는 말이지만, 뜻이 좁혀져 대통령 부인, 대통령 아들, 대통령 딸만을 가리켜야 했다. 영부인, 영식, 영애의 ‘영/령(令)’이 대통령의 ‘령(領)’과 포개져버린 것이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이 흘려보내기 시작한 민주화의 물살은 언론학자 강준만이 ‘권력변환’이라고 부른 과정을 통해서 언론에 실팍한 힘을 실어주었다.
우리 사회를 주물럭거리는 힘에서 정치권력에 뒤지지 않을 만큼 언론권력은 제 근육을 키웠다. 기품 없는 언어로 정치권력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데 지면의 적잖은 부분을 배당하는 수구 과점 신문들이 그 정치권력을 향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외치는 SF적 광경도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언론의 힘은 너무나 커져서, 이젠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언론의 힘이 무소불위라고는 할 수 없다. 언론은 정치권력쯤은 이제 무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경제권력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언론은 청와대나 국정원보다 삼성을 더 겁낸다.
정확히 말하면 언론은 경제권력을 무서워한다기보다 경제권력과 융합하거나 거기 포섭되고 있다. 경제권력과 융합한 언론권력은 제 언론자유를 극대화하는 한편 타인의 언론자유를 제약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은 언론자유의 디딤돌이면서 걸림돌이다.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또 다른 힘은 민족주의다. 오늘날의 주류언론이 독자나 시청자들의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거스르며 제 논조를 펴기는 힘들다. 여기서도 언론은 민족주의를 무서워한다기보다 민족주의와 융합한다. 그것은 자본-언론 복합체로서도 현명한 일이다. 민족주의야말로 국민국가 시대의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언론 복합체는 우리 사회를 주물럭거리는 힘에서 정치권력에 뒤지지 않을 만큼 제 근육을 키웠다. 그래서 이젠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황우석, 한류, WBC, 월드컵 축구 따위를 전하는 활자들과 이미지들이 지면과 화면 위에서 과장된 정서로 출렁이는 것은 그것이 민족주의-상업주의 코드에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원수를 천황이 아니라 국왕이나 왕으로 부르는 관행도 이와 관련이 있다. 입헌군주국의 원수는 일반적으로 왕이어서 일본 천황도 왕으로 부른다는 논거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언론은 19세기초 프랑스 황제를 나폴레옹 왕이라고 부를 것인가?
언론의 자유에선 언젠가부터 악취가 새나오고 있다. 그 위력에서 전통 언론을 제치고 있는 인터넷 언론이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터넷 언론의 주체들은, 평범한 네티즌까지 포함해, 이미 자본과 민족주의에 깊이 포섭돼 있다. 그리고 인터넷 공간의 익명성 탓에 언론의 자유가 내뿜는 악취는 더 짙어졌다.
상습적인 악플러(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이래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 바 ‘7악마 사건’ ‘개똥녀 사건’ ‘서울대 도서관 폭행 사건’ ‘성추행 교사 사건’ 등에서 네티즌들이 실천한 ‘언론활동’은 정의의 실현이 사적 차원에서 어디까지 허용돼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거리를 남겼다. 인터넷은 10년 전 문학평론가 정과리씨가 불길하게 내다본 ‘문화의 크메르루주’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세계 언론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
매년 5월3일을 세계 언론자유의 날로 정한 것은 1993년 12월20일 유엔 총회에서다. 이에 앞서 1991년 4월29일부터 5월3일까지 아프리카 남서부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서는 ‘독립적이고 다원적인 아프리카 언론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유네스코 세미나가 열린 바 있다. 세미나 마지막 날인 5월3일 자유언론의 원칙들을 담은 빈트후크선언이 채택됐는데, 세계 언론자유의 날이 5월3일로 정해진 것은 이 빈트후크선언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빈트후크선언은 독립적 저널리즘과 참여민주주의의 성공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자유로운 언론이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의 핵심 보루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 언론자유의 날에는 언론자유의 옹호와 신장에 이바지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유네스코가 기예르모 카노 세계 언론자유상을 수여한다. 이 상 이름은 콜롬비아 기자 기예르모 카노 이사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엘에스펙타도르 기자였던 기예르모 카노는 콜롬비아 마약조직을 대담하게 파헤친 기사들로 이름을 얻었으나, 1986년 12월17일 자기 회사 앞에서 살해되었다. 올해의 기예르모 카노 언론자유상은 레바논의 여성 저널리스트 마이 시디아크에게 돌아갔다. 레바논방송공사(LBC)의 뉴스앵커인 시디아크는 지난해 9월25일 그의 목숨을 노린 폭탄 테러로 왼손과 왼다리를 잃었다.
1997년 이 상이 제정된 이래 지난해까지의 역대 수상자는 중국의 가오유, 나이지리아의 크리스티나 아니야누, 멕시코의 헤수스 블랑코르넬라스, 시리아의 니자르 나이유프, 미얀마의 우 윈 틴, 짐바브웨의 제프리 니야로타, 이스라엘의 아미라 하스, 쿠바의 라울 리베로, 중국의 청이종이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