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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과소비/ "우리는 디지脫가족" 디지털 off 행복 on

입력
2006.05.0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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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인터넷 바둑에 빠져 있고 엄마는 TV홈쇼핑과 위성방송 드라마를 보느라 종일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중학생 아들은 휴대폰으로 다운로드한 모바일 격투 게임에 몰입해 식사시간도 잊고 살고, 별명이 ‘엄지여왕’인 초등학생 딸은 수업시간에도 쉼 없이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는다.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21세기 대한민국 가족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디지탈(脫) 가족’이 있다. 경기 용인시 보정동에 사는 오세훈(46ㆍ삐우앤삐우 대표)씨 가족이다. 이들은 “휴대폰 인터넷 TV 등을 멀리하니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가족이 한데 뭉치고 화목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지난달 24일 오후 8시, 이사 온 지 한 달 됐다는 오씨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현관 문에 들어서니 보통 집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소파와 탁자, TV가 놓여있기 마련인 거실엔 큰 책꽂이와 책상, 의자가 자리잡고 있다.

큰 딸 상림(16ㆍ독수리기독중 3년)이와 현석(14ㆍ글로벌리더십국제학교 1년) 율평(12ㆍ보정초등학교 5년) 등 두 아들이 숙제와 독서를 하는 곳이다. 테라스엔 티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각자 일터와 학교에서 시간을 보낸 가족들이 저녁 때 모여 차를 마시고 대화를 하는 곳이다.

오씨는 2002년 거실에 있던 TV를 재활용센터로 보내버렸다. 아내가 방송작가이고 전국 방방곡곡이 월드컵 열기로 달아오를 때였지만, 아이들이 TV라는 ‘독약’에 길들여지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씨는 “아이건 어른이건, 집에 돌아오면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리모컨부터 집어 드는 모습을 보고는 어느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면서 “정보와 오락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되는 TV의 일방성은 아이들의 사고를 편협하게 만들고 창의성과 영적 성장을 멈추게 하는 주범”이라고 말한다.

2년 전엔 상림이의 휴대폰도 없앴다. 세 자녀 중 유일하게 휴대폰을 갖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먼저 ‘휴대폰 소지 금지’ 규칙을 따라 줄 것을 요청해왔다. 오씨 부부는 당시 ‘흉흉한 세상인데 딸 아이에게 비상용으로 필요한 게 아닐까’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엔 학교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냥 갖고 다니게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어요. 일단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단말기 가격이나 요금이 지나치게 비싼 편입니다. 게다가 모바일 게임이다 DMB 방송이다 별의별 기능이 많이 나오는데, 자제력이 부족한 10대를 어떻게 ‘위험한 기계’에 무방비로 맡길 수 있겠어요?”

인터넷도 엄마 아빠의 허락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 책을 읽다 궁금한 내용을 검색하거나 숙제 할 때 도움을 받는 경우에 한해서만 허용된다. ‘문명의 이기’와 담을 쌓은 오씨 가족에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디지털과의 접속이 줄어들수록 이전에는 24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던 하루가 무척 길어졌어요.” 오씨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다.

상림이는 오후 5시30분께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책을 손에 잡는다. 최근엔 미국 작가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감명 깊게 읽었다. 드럼을 배우러 1주일에 한번 음악학원에도 다닌다. 현석이는 독서량이 월등히 늘었다. 집중하면 하루에 책을 3권 이상 읽기도 한다.

학원도 안 다니면서 줄곧 1등을 놓치지 않는 율평이는 모형 탱크 조립과 요리에 취미가 붙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상상할 시간’이 많아져 스스로 영화 콘티를 짜보기도 한다.

가족관계도 예전보다 화목해졌다. 다른 가족들이 TV 앞에 넋을 빼고 앉아있는 동안, 부모와 자녀가 어울려 장기를 두거나 배드민턴을 하기 때문이다. 엄마 노순(44)씨는 “중독성이 강한 디지털이라는 ‘방해물’이 없어지면서 아이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과연 이런 디지탈(脫) 생활에 전혀 불만이 없는 것일까. 늦은 저녁 오씨 부부가 동반 모임이 있다며 외출을 하자 세 남매는 웃으면서 이런 저런 아쉬움도 드러냈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갑자기 바뀌거나 길이 어긋날 때 휴대폰 생각이 간절하죠.”(상림), “엄마나 친구를 갑자기 찾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아쉬워요. 친구들은 MP3나 휴대폰을 다 갖고 있는데….”(현석), “보고 싶은 영화를 TV나 인터넷으로 마음껏 못 보는 거요.”(율평)

오씨 부부가 자녀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부부의 생각은 확고하다. 아이들에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생기고, 금전과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는 시기가 오면 자연스레 ‘차단 해제’가 이뤄지리라는 생각이다.

현석이는 평소 갖고 싶었던 MP3를 사기 위해 매일 저녁 설거지를 도맡아 하고 1,000원씩 용돈을 번다. 지하철로 40분이 넘는 통학시간 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어회화를 듣고 싶어서다. 오씨 부부는 일단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공짜는 없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유혹이 존재합니까! 아이들에게 이런 중독성 강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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