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층 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수 많은 산과 물이 한 눈에 트이네…돌아보니 동쪽 도읍의 많은 집들이 벌집과 개미구멍처럼 아련히 보이네.’
고려 명종(재위 1170~1197) 때의 시인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가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 읊은 시다. 높이가 80m를 넘었다는 장대한 목탑의 위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1238년 몽골 침략 당시 불길 속에서 사라진 9층 목탑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신라인이 온 힘을 기울여 만든 황룡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황룡사 복원은 2034년까지 3조2,800여억원이 투입되는 경주 역사문화 도시 조성 사업의 성패를 가늠할 핵심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부터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걸쳐 93년간 조성된 황룡사. 그 옛터에서는 금동불입상 등 4만여 점의 유물과 높이 182㎝의 대형 ‘치미’(용마루 끝 장식물)가 출토됐다.
하지만 황룡사 복원 사업은 거센 논란의 한 가운데 있다. 당시 건물이나 목탑의 모양, 건축 양식 등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증거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목탑은 뜨거운 감자다. 목탑이 21세기 형으로 ‘중창’ 되어야 한다는 입장(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과 건축 양식을 고증할 길이 없으니 복원이든 중건이든 ‘말살’(강우방 이화여대 교수 등)이라는 견해가 맞서있다.
실제 1929년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처음 목탑 복원안을 만든 이래 지금까지 제시된 목탑 복원안은 숱하게 나온 만큼이나 중구난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경주박물관, 민속박물관, 독립기념관 등에 놓여있는 모형도 제각각이다.
이상해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28일 이틀간 일정으로 경주에서 열린 ‘황룡사 복원과 그 과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목탑 복원안을 살펴보면 각각 한 예를 제시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 고대 다층 목탑구조 형식의 공통분모를 찾는 논리적,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복원안은 일반론적 모델이 될만한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니콜라스 스탠리 프라이스 전 국제문화재보존복구연구센터(ICCROM) 사무총장도 복원은 예외적 상황에서, 또 완벽한 증거가 있을 때만 시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그는 ‘복원의 증거를 알리지 않고 복원된 건물을 보여주는 게 도덕적인가’‘잘못 복원됐음이 판명됐을 때 어떻게 하나’등에 대한 답이 명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 입장은 그러나 완벽한 고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원형에 집착하는 황룡사 복원 논의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고증 아래 재현ㆍ중창ㆍ중건 등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황룡사 복원’의 영문 명칭도 그래서 ‘Reconstruction’이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황룡사복원사업단장은 “신라인들이 황룡사에 100여년 동안 국력을 기울였듯이, 복원에는 수 십 년간 여러 분야의 힘을 합쳐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 문화재 복원/ 되살아난 문화재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동 1층 복도 끝에는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늘씬한 자태의 경천사탑이 서있다. 고려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이 탑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10년에 걸친 보수공사가 있었다.
경천사탑은 원래 북한 지역인 경기 개풍군 경천사에 있었다. 1907년 일본이 해체해 도쿄로 밀반출했다가 비난이 쏟아지자 1918년 반환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탑은 해체된 채 방치돼 있다가 60년 경복궁 경내에 복원됐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탑의 속을 콘크리트로 채우고 외부 결실 부분도 콘크리트로 처리했다. 산성비 등의 영향으로 풍화현상이 나타나고 한쪽으로 약간 기울면서 안전문제가 제기되자 95년 전면 해체 복원이 시작됐다. 탑은 모두 145개 부분으로 해체됐는데, 개별 부재마다 오염물을 제거한 뒤 기단(基壇)부터 조립했다.
1㎜만 어긋나도, 조금만 잘못 맞춰도 일을 다시 해야 했다. 대전 연구소에서 전체를 조립해본 뒤 다시 해체하고, 이를 서울로 옮겨와 최종 조립함으로써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었다. 문화재연구소 석조보존실 김사덕 박사는 “우리나라 최대의 문화재 복원”이라고 평가했다.
700년전 원과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인 ‘신안선’의 복원도 극적이다. 75년 전남 신안군 해상에서 발견됐을 때 배는 뱃머리가 북동쪽으로 뉘어진 채 20m 깊이의 바다에 매몰돼 있었고, 본 모습은 대부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갯벌에 묻힌 부분은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었다.
선체는 81년부터 인양됐다. 너무 컸기 때문에 수중에서 750조각으로 해체한 뒤 4년에 걸쳐 건져 올렸다.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은 들어올린 목재를 약품 처리해 단단히 굳게 한 뒤 못 등을 이용해 다시 붙였다. 배가 길고(잔존 길이 28.4m, 실제 길이 약 34.8m) 무거워 조립에는 크레인이 이용됐다. 5분의 1 크기의 모형배를 만들어 실험 조립도 했다.
조립은 인양이 시작된 지 23년이 지나서야 완성됐고, 배는 현재 해양유물전시관에 진열돼있다. 이철한 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팀장은 “ 아시아에서 발견된 고선박 가운데 가장 큰 배”라며 “이 배를 조립하면서 조립은 물론 목제 유물 보존처리 기술이 크게 향상됐다”고 말했다.
이 정도의 거창한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최고 인기 유물인 ‘반가사유상’과 ‘신라 금관’ 역시 보존 처리를 거쳤다. 녹을 벗기고 추가 부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유의 자태와 색상을 되살린 것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 유물 보존 방법
문화재 보존ㆍ복원 기술은 첨단과학과 함께 섬세한 인간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인내와 끈기의 작업이다. 이규식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은 보존ㆍ복원의 대원칙으로 “아무리 효과가 좋은 방법이라도 문화재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도움을 얻어 유물 보존 방법을 알아보자.
▲ 금속 유물
부식, 쉽게 말해 녹을 없애고 방지하는 게 핵심이다. 철, 청동ㆍ구리, 금은은 손상 원인과 보존 방법이 다르다. 염이온(Cl) 탓에 부식되는 철은 고온고압으로 탈염 처리를 하지만, 구리는 녹을 막는 방청용액에 담궈 보호 피막을 만든다. 이물질 제거도 딱딱한 철은 미세한 유리가루를 고압으로 불어주는 정밀 분사가공을, 무른 청동과 금은은 현미경과 수술용 칼 바늘 등을 쓴다. 재부식을 막기 위해 진공함침기(vacuum impregnator)로 수지 코팅을 하는데, 재처리가 필요한 경우를 고려해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아크릴을 쓴다.
▲ 목재 유물
저습지 바다 등에서 발굴된 목재는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공기가 없어도 살 수 있는 혐기성 미생물이 세포벽을 분해해 곧 스폰지처럼 가라앉고 만다. 폴리에틸렌글리콜을 투입해 형태를 유지하고, 에틸렌옥사이드가스와 메틸브로마이드를 섞은 훈증 소독으로 추가 미생물 부식을 막는다.
요건은 나무의 종류와 연령, 분해 상태의 정확한 파악이다. 옛 목조 건축물은 호박벌과 나나니벌, 흰개미, 빗살수염벌레 넙적나무좀 등에 의한 피해가 크다. 훈증 소독으로 벌레를 죽이고 표면을 방충ㆍ방부 처리한다. 나무에 칠을 한 목칠공예품은 어떤 성분의 칠을 몇 번 겹쳐 발랐는지 분석하는 게 관건이다.
▲ 석재 유물
장기간 특별한 보호시설 없이 야외에서 비 바람, 대기오염 등에 직접 노출돼 돌이 떨어져 나가거나 부스러지고, 금이 가고, 이끼류 등에 오염되는 등 심하게 훼손된다.
때문에 보존ㆍ복원을 위해 국지적 기상관측도 필요하다. 약화한 석재에 대한 강화 처리와 접착에 흔히 사용되는 에폭시수지는 열에 약해 새로운 재료를 연구중이다. 바르면 마르면서 딱딱해지지만 곧 승화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새로운 화합물 도입도 연구되고 있다.
▲ 서화 유물
종이나 섬유는 6~8%의 수분을 머금고 있을 때 원형이 유지되는데 습기가 많아지면 약해지고, 온도도 높아지면 리그닌 성분이 파괴되 갈색으로 변하거나 바스러진다.
셀룰로오즈 성분은 곤충이나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이물질ㆍ얼룩 제거를 위해 붓으로 털어내거나(건식) 증류수에 담그는데(습식), 오염이 아주 심한 경우 외에는 약품은 잘 쓰지 않는다. 구멍이 난 유물도 많은데 같은 재질의 재료를 밑에 덧대어 메우는 ‘대접처리’를 한다.
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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