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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길위의 이야기] 여성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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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길위의 이야기] 여성의 적

입력
2006.04.29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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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담배 파이프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상아, 윤이 흐르는 검은 나무, 금으로 테두리를 한 뿔, 장미뿌리, 흙으로 구운 것… 트로츠키가 쓰던 것들이란다. 누군가 내게 원하는 걸 가져가라고 했다.

담배파이프를 좋아하는 친구 생각이 나서 흑단으로 된 길고 가는 파이프를 골랐다. 누가 썼던 걸 그냥 줄 수 없잖아. 잘 씻어서 말려야지. 서점에 가서 담배파이프 관리하는 법에 관한 책을 사야겠다, 생각하며 잠이 깼다. 몽롱한 가운데, ‘담배파이프 관리에 관한 책 살 것, 잊어버리지 말자’ 생각하며 메모지를 찾아 손을 뻗다 정신이 났다.

그 친구는 호흡기가 약한데도 담배를 늘 입에 물고 산다. 말린 풀 부스러기를 채워 넣은 한 겹 종이기둥, 손가락보다 가는 그것에 몸과 마음을 의탁하고 휘둘린다. 흡연은 일종의 틱 증상이다.

그 친구는 그 틱의 과정에 가끔 담배파이프를 등장시킨다. 좋은 일이다. 유해물질도 더 걸러질 테고 파이프를 만지는 동안 담배를 덜 필 테니까. 맵시는? 글쎄, 빨부리를 물고 있는 건 아무래도 덜 여성적으로 보인다. 하긴 탁한 눈알에 피부는 훈제돼 뻣뻣하고, 입가는 쭈글쭈글! 담배는 애초에 여성의 적이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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