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소식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 수년간 한국인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준 한류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한 토론도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토론을 지켜보면서 한류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한류의 과거에 대한 물음과 같이 갈 때만 진정한 사색의 향연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물음만큼 중요한 것이 한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이다.
수천년 이어온 민중문화 에너지
한류는 분명 한국인의 ‘딴따라 기질’에서 왔을 것이다. 춤과 노래에서만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다. 그러면 이런 특성은 어디서? 전문가마다 설명이 다르겠지만 끝내는 한국인의 무속적 기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류 자체가 드라마, 가요, 영화, 온라인 게임, 패션, 음식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쾌거라면, 과거 한국 기층문화는 무속의 품 안에서 보존되어 왔다. 수천년에 걸친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적 유래와 이념적 기원은 무속적 상상력에 있는 것이다.
무속적 상상력의 특징은 감성적 충동과 즉흥성에 있다. 여기서는 형식적 균형을 깨는 파격, 비대칭을 낳는 역동적 흐름이 관건이다. 흐를 류(流)자를 집어넣어 한류라는 말을 지어낸 것은 중국 언론이었지만, 이점을 생각하면 통찰력 있는 작명이라 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만이 아니라 과거 한국인의 특성까지 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 이미지 홍보 차원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다이내믹 코리아’도 그 작명 경위야 어떻든 과거 민중문화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한류, 나아가 한국적 역동성 일반의 기원에 있는 무속은 미래의 한국문화에 대해 귀중한 영감과 해석의 원천이다. 무(巫)라는 한자는 춤을 출 때의 옷소매 모양(人人)과 그 춤에 내재하는 어떤 절도(工)를 함께 묶어 만든 글자이다. 무대에서 H.O.T.가 춤추는 모습을 그린 듯한 이 말이 함축하는 것처럼, 무속적 역동성은 단순히 질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떤 무질서의 질서, 비형식의 형식이다.
물론 이런 역동성은 비합리적 충동과 광신적 맹목으로 빠져들기 쉽다. 무속적 상상력이 통제 불가능한 광기로 번져갈 가능성, 이 끔찍한 위험성이 과거 한국문화의 진보와 좌절을 모두 설명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가령 중국보다 더 유교를 숭상했던 이유가 그렇다. 민중의 심성 밑바닥에 들끓고 있는 정념적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력한 형식주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언제든지 광기를 띨 수 있는 이 심리적 에너지에 대항하여 공공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유교 경전의 절대화로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무(巫)는 춤을 통해 하늘과 땅을 잇는다(工)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해석은 한국적 초월성의 원형을 예감할 수 있는 단서이다. 사실 서양의 형이상학과 종교는 감성적인 것에서 초감성적인 것으로 향한다.
이는 특수에서 보편으로, 다수의 개체에서 포괄적인 일자(一者)로 나아가는 상향적 초월이다. 반면 무속은 감성을 통한 감성의 극복이고 개체로 귀착하는 하강의 초월이다. 신명이니 신바람이니 하는 말 속에 이런 이해가 담겨있지만, 그것은 차이와 다수를 살린다는 점에서 예술적 초월과 닮았다.
감성적 사유의 전통이 큰 자산으로
기층문화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온 무속적 사유는 과거의 한국 지식인들에게 도피와 방어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한류는 이런 감성적 사유의 전통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임을 일깨우고 있다. 그 뜨거운 에너지 속에 고도의 관념과 표현형식들이 모두 녹아들었다가 다시 태어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통념에 비추어 볼 때, 고급문화의 한류가 흐를지 모를 미래의 가능성도 여기서부터 가늠해야 하지 않을까.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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