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시위로 달구었던 최초고용계약(CPE)을 프랑스는 결국 포기했다. 프랑스 정부는 고용창출을 위해 사용자에게 26세 미만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깊이 보면 경쟁원리를 축으로 삼는 경제의 세계화와 노동자보호에 중점을 두는 유럽의 사회 모델이 CPE를 매개로 충돌했다는 분석이 많다.
세계화에 대한 대응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은 유럽 모든 나라에 공통된다. 작은 세계화라고 할 유럽통합을 이룬 선진 유럽 국가들도 자본의 이동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해왔다.
미국의 세계화 논객들은 CPE 사태를 두고 ‘프랑스 국민의 자유시장경제 선호도가 나이지리아인 보다 낮으며 프랑스는 사회주의적 유럽을 고수하려는 나라’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프랑스 대학생들이 한번 쓰고 버리는 ‘크리넥스 노동자’를 양산하는 법안이라고 CPE에 반대했던 것처럼, 미국에도 ‘일회용 미국인(Disposal Americans)’이 늘었다는 불평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한국식으로는 비정규직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프랑스가 CPE로 들끓는 동안 미국에서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기업이 미 항만운영권을 인수하려는 것을 놓고 소동이 벌어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안보상 위협이 없다”고 밝혔지만, 의회는 “아랍 기업에 항만을 넘겨줄 수 없다”며 규제법안을 만들려고 했다.
UAE 기업의 인수 포기로 끝난 이 소동은 국경 없는 자본의 이동과 자유무역을 역설하는 세계화의 주장(主將) 미국도 내부 조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이 어우러진 에너지 기업의 인수ㆍ합병(M&A)이 논란이 됐다. 국경을 없애고 단일통화를 채택한 유럽이지만 각국은 핵심 에너지기업이 다른 나라 기업에 넘어가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나온 외국자본에 의한 M&A 규제 움직임은 세계화 시대에 해괴하게도 ‘신보호주의’ ‘경제 애국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지금 미국 최대의 이슈인 이민규제 강화법안도 세계화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상적인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이동을 허용하는 만큼 인간 즉 노동자의 자유이동도 보장해야 마땅하지만 아직 인간에는 장벽이 존재한다.
세계화가 진척되면 시장의 기능이 커지고 국민경제가 통합돼 국가의 기능은 축소된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올 봄 미국과 유럽의 고민을 보더라도 축소될지언정 국가=정부의 대외 교섭, 사회 안전망 확충, 이해집단 사이의 자원배분 기능이 아직은 중요하고 절실하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이미 현실인 세계화가 국민 개개인을 피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10여년 전 세계화를 국정목표로 내걸고도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혹독한 세계화의 시련을 경험했다. 한참 수사가 진행 중인 공적자금을 악용한 현대차의 부실처리,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입 의혹도 “세계화에 대응하는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는가” 하는 근본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정부는 세계화 원산지국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한국이라는 국가, 좁혀서 노무현 정권의 기능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 것 같다.
신윤석 국제부장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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