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나를 버렸다. 완전 범죄는 끝났다.”
24일 구속된 연쇄살인 용의자 정모(37)씨는 22일 경찰에 붙잡히면서 이렇게 내뱉을 정도로 치밀한 범죄 행각을 벌였다.
정씨는 또 2004년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서울 서남부 연쇄 피살ㆍ피습사건도 저질렀다고 자백, 경찰 수사가 진척되면 ‘잔혹 살인극’의 전말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문열린 단독주택만 골라
정씨는 주로 새벽 시간에 문단속이 소홀한 단독주택에 침입, 쇠망치 등 둔기로 자고 있던 사람을 때려 중상을 입히거나 살해했다. 주로 지하철 2호선을 이용했기 때문에 범행 지역이 2호선 지하철역 주변인 봉천동, 시흥동, 신길동 등에 집중됐다.
정씨의 완전 범죄에 대한 집착은 여러 군데서 엿볼 수 있다. 자신의 거주지인 인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울 서남부를 범행 장소로 택해 수사에 혼선을 주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또 CC(폐쇄회로)TV가 많이 설치된 강남 지역은 피했다.
그러다 보니 범행 대상은 비교적 범죄가 수월한 저소득층 가정이나 여성들이었다. 정씨는 또 안경과 마스크를 항시 휴대해 인상착의를 숨겼고, 성폭행을 염두에 두고 콘돔까지 준비했다. 2건에서는 불을 질러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회에 대한 적개심
정씨는 인천에서 노모와 동생, 누나 등과 함께 살았다. 가족 모두가 노모 소유의 허름한 주택에서 나오는 월세 55만원으로 생활하고 있을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다.
95년 절도 혐의 등으로 수감 생활을 한 이후 별다른 사회 생활 없이 집에 틀어박혀 공상과학 책을 보며 소일할 정도로 대인기피증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경찰에서 용돈 마련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건 중에서 피해 물품이 신고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정씨가 “결혼도 못하고 직장도 못 구해 세상에 화가 났다”고 밝힌 점, 강도 행각을 벌이려고 가정집에 침입했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피해자들을 둔기로 때린 점 등으로 미뤄 사회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
추가 범행의 진실은?
정씨는 경찰에서 2004년 2월부터 3개월간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부녀자를 상대로 발생한 연쇄 피살ㆍ피습 사건 가운데 3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2004년 2월 26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귀가 중이던 박모(18)양이 괴한의 칼에 찔린 사건을 비롯해 같은 해 2월 22일 고척동 여대생 살인사건, 5월 9일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살인 사건 등이다. 경찰은 정씨가 비교적 상세히 범행 내용을 진술하고 있어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은 길을 가던 행인을 상대로 한 데다 범행 도구가 둔기가 아닌 흉기였다는 점에서 5건의 사건과는 다르다. 범행 동기도 용돈 마련 등의 표면적 이유가 없는 완벽한 무동기 범죄로 추정된다. 게다가 정씨의 범행을 입증해 줄 만한 뚜렷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정씨가 자기 과시욕에 빠져 허위 진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1명을 살해한 유영철도 2004년 검거 당시 자신이 서울 서남부 살인사건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가 말을 바꾼 적이 있다. 경찰은 정씨의 자백을 뒷받침할 증거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프로파일러 사건 분석 정확 "4건의 살인… 범인은 하나"
프로파일러는 알고 있었다.
봉천동 세자매 살해사건 등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 정모(37)씨 사건은 서울지방경찰청 프로파일링팀(범죄분석팀)의 주요 분석 대상이었다. 권일용(42) 경사, 윤태일(34) 김경옥(30) 김윤희(28) 경장 등은 지난달 27일 세자매 살해사건 직후 연쇄살인에 무게를 두고 범인의 윤곽을 좁히고 있었다고 24일 밝혔다.
프로파일러 4인방이 연쇄살인으로 본 건 세자매 살해사건을 비롯해 봉천10동, 봉천11동, 금천구 모자(母子) 사건 등 4건이었다.
처음부터 무동기(이상동기)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가닥을 잡진 않았다. 모자, 장애인, 남매, 자매 등 피해자의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유영철이 일관되게 돈 많은 사람과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것과는 달랐다. 이 때문에 각각을 원한에 의한 살인, 혹은 강도에 의한 범행으로 여겼다.
수 차례의 회의와 갑론을박이 이어진 뒤에야 연쇄살인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사건 현장과 범행 도구, 침입 방법, 범행시간대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분석은 이렇다. 범인은 새벽 3시~5시에 출입문이 잠기지 않은 2층짜리 단독주택(범인 정씨가 살던 집 구조와 비슷함)만 골라 범행을 저질렀다. 윤 경장은 “범인은 막차나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현장에 도착해 범행 대상을 물색했을 것이기 때문에 시흥 등 서울 남부에 살고 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범인이 같은 둔기로 피해자의 머리만 마구 때린 것도 일치했다. 프로파일러들은 “범행 도중 고요함과 두려움을 참지 못해 피해자를 수없이 때린 것으로 보인다”며 “대인기피증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