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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病/ (上) 덩치커진 '동맥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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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病/ (上) 덩치커진 '동맥경화'

입력
2006.04.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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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 공룡化가 병폐 부른다

“삼성전자에 고정관념, 이기주의, 형식주의, 권위주의, 타성 등 ‘5대 병폐’가 없었다면 주가는 이미 200만원을 돌파했을 것이다.”

삼성전자 주가가 69만원까지 치솟은 21일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미국 애플의 세계적인 히트 상품인 ‘아이팟 나노’(MP3 플레이어) 신제품에 삼성전자가 핵심 부품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 힘입어 전일보다 4.07%나 급등했다. 그러나 지금 애플이 누리고 있는 대박의 성과는 삼성전자의 몫이 될 수 있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지적이다.

사정은 이렇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은 이미 2000년 애플보다 일찍 MP3 플레이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측은 초기 시장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라며 명확한 실적 전망 등을 숫자로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오디오기기 사업부를 분사, 자회사 ‘블루텍’을 만든 뒤 이곳에서 MP3 플레이어 사업을 하도록 했다가 MP3 시장이 급성장하자 지난해 블루텍을 부랴부랴 흡수했다. 하지만 애플은 이미 세계 시장의 70%를 선점한 상태였다. 이건희 그룹회장이 2월초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귀국하면서 “조직이 비대해져 느슨해진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강조한 것도 그룹에 스며있는 대기업병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기업들이 대기업병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덩치가 커지고, 조직이 관료화하면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각종 병리(病理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에 만연한 관료주의로 유망 사업기회를 상실하거나, 계열사간 이기주의에 휘말려 유망사업의 증설이 지연돼 경쟁력을 상실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경영진의 의사결정 지연으로 사업구조 재편기회를 날려버려 경영난을 겪는 재벌들도 많다. 대기업들마다 외환위기이후 투명경영을 내세우고 있지만, 일부 대기업들에선 여전히 오너들간의 경영권 다툼과 비자금 조성으로 한국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비자금조성 의혹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ㆍ기아차그룹의 경우 그동안 자동차 판매 호조 등의 성과에 안주, 위기 인식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아 화를 자초했다는 게 중론이다. 이 그룹은 2010년 ‘글로벌 톱 5’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동안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와 편법적인 부실기업 인수 등을 통해 몸집 부풀리기에 주력해왔다가 수뇌부가 검찰에 줄줄이 소환되는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양보다는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일부 목소리는 설자리를 잃어버렸다는 지적이다.

SK그룹과 KT&G가 최근 투기 자본의 사냥감이 된 것도 대주주 지분이 낮아 투기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외부의 잇단 지적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해 초래된 측면이 있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 전문가들 "대기업病 방치땐 한국경제 큰 부담"

“지난해와 똑같은 주제의 경영 컨설팅을 또 맡아 달라고요?”

미국에서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국내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A(40)씨는 국내 대형 소비재 업체의 신규 사업 전략 컨설팅을 10년째 맡고 있다. 그 동안 같은 보고서를 수도 없이 냈지만 이 회사가 정작 신사업에 진출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A씨는 “사내 논객들만 늘어가고 정작 어려운 일에는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대기업병은 인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기업에겐 가장 위협적인 병”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의 대기업병이 이미 심각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기업 규모가 클수록 병세도 중해 이를 치유하기위한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사업부문별 지나친 경쟁과 이기주의가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이 37인치 액정화면(LCD) TV를 내놓은 것이 단적인 사례다. 당시 세계 LCD TV 시장은 37인치로 대표되는 LG전자, 필립스, 도시바, 샤프 등의 6세대 진영과 40인치를 주력으로 하는 삼성, 소니 등의 7세대 진영이 세계 표준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때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이 사내 LCD 사업부문의 전략에 발 맞추기 보단 경쟁 진영의 사이즈를 내놓아 전열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삼성전자 LCD 사업부문이 소니에 LCD 패널을 팔며 제 식구인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보다 더 낮은 가격에 공급,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이 타격을 입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의 핸드PC 겸 개인정보단말기(PDA)인 ‘넥시오’가 고전하게 된 것도 사업부문간 경쟁의 희생양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은 2003년 넥시오를 내면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 사업부문에 통신 모듈 기술과 연구 인력 등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핸드폰을 생산하고 있는 정보통신 사업부문은 잠재적 경쟁 제품이 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은 이듬해 넥시오를 단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불협화음은 회사조직이 너무 비대해져 사업부문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데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ㆍ기아차가 비자금 조성의혹 등으로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그룹내 비판의 목소리나 외부 지적에 귀를 닫아 ‘안테나 기능’이 마비된 데 따른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LG그룹의 경우 2000년대초 카드사태로 금융부문을 접어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LG카드는 길거리 회원 모집 등을 통해 회원수를 늘리는 등 무리한 공격경영으로 업계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후 카드대란으로 금융시장이 동맥경화에 걸리면서 대규모 부실채권을 양산, 카드사업은 물론 증권 등 금융사업을 매각해야 했다.

SK그룹은 글로벌의 분식회계 문제로 총수가 영어의 신세를 지고, 채권단의 압박으로 그룹 자금줄에 비상벨이 울리는 등 적지않은 후유증을 겪었다. SK는 그 후 경영투명성 제고,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을 통해 대기업병 해소에 적극 나서고 있다.

코오롱은 제 때 구조조정을 못해 성장정체에 시달리고 있다. 이동통신사업(신세기통신)에서 철수한 코오롱은 그 후 유통, 정보통신등에서 신성장 사업기회를 찾았으나, 오너의 리더십 부재와 의사결정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저수익사업의 경우 과감한 철수가 필요한데도 상층부에서 결단을 미뤄 부실을 키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병을 방치할 경우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인 GM이 대기업병으로 휘청거리면서 지난해 미국 경제는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1995년 당시 대기업병으로 허덕이던 도요타자동차 수장에 취임한 오쿠다 히로시 사장이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일본은 아직도 10년 불황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히로시 사장은 당시 연공 서열제를 폐지하고 사내 벤처 육성 및 해외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자문위원회 설립 등을 통해 도요타의 글로벌 스탠더드화를 밀어붙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선진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아직도 구태경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대기업오너와 임직원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대기업병 극복을 위한 일대 혁신을 벌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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