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저 사람 눈 봐. 진짜 같다.”
설치와 사진 등에 밀려있던 극사실주의 그림에 관객이 오랜만에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찬찬히 작품을 살피는가 하면, 반대로 멀찍이 떨어져 여유를 갖고 음미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한결 같은 한마디. “진짜 잘 그렸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상’에서 19일 개막한 이상원(71)씨의 ‘영원의 초상’ 전. 이씨가 그린 인도 사람 초상 40여점이 전시중이다. 지난해에도 같은 내용의 작품전을 열었는데 이번 것이 더 생생하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흩날리고, 얼굴에는 주름이 움푹 패어있다. 치아는 까맣게 썩어있다. 시름에 잠기거나 미소 띤 표정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를 초상화의 대가로 부르는 이유를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는 강원 춘천농업학교 재학 시절, 그림이 좋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영화 간판과 미군 기지촌 납품업자 초상화를 그렸다. 재주를 타고 났던지, 곧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한번 이름이 나자 유력 인사들이 그를 찾았다. 많을 때는 하루 20장 정도 초상화를 그렸다. 사진 등을 참고해 그가 그린 국내외 국가 원수의 초상화만 70~80장 정도 된다. 국가 원수급의 초상화를 그리면 장 당 2,000만원 정도를 받았다. 1960년대 당시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초상화 주문 그림에 미친 듯 빠져 있을 때, 한 시인이 이렇게 충고했다. “당신은 화가가 아니라 기술자다. 진짜 화가가 하는 일은 똑같이 베껴 그리는 작업이 아니라 그림에 철학을 담는 것이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상업미술을 접고 순수미술로 전환했다. 산수(山水)를 시작으로 자동차 바퀴자국, 마대 등 독창적 소재를 발굴했다. 더 이상 그림을 팔지 않았다. ‘이제 돈을 좇는 그림은 그리지 않겠다’는 고집에서였다.
90년대 후반에는 다시 인물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동해안으로 달려가 몇 년간 어촌 사람을 그렸다. 그들에게서 한국 현대사를 몸뚱이와 가슴으로 견뎌낸 것 같은 삶의 상처가 느껴졌다. 한이었다.
2003년에는 새로운 소재를 찾아 인도로 갔다. 동해와 또 다른 인간 전형이 있었다.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버겁게 살고 있는 동해인과 달리, 인도인은 영혼이 한결 자유로워 보였다.
“고생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우리와 달랐어요. 뭐든 긍정적이고 인내합니다. 배우는 게 많으니까 인도에 자꾸 가게 되네요. 내년에 또 갈 겁니다.” 지겨워 질 때까지 인도인을 그릴 생각이란다.
작품도 다시 팔기로 했다. 꼭 30년 만이다. 올해 말 문 닫는 갤러리 상의 관장인 아들 승형씨의 설득 때문이다. 승형씨는 부친의 작업실이 있는 춘천에 미술관을, 인근 화천에 창작 스튜디오를 각각 설립할 계획인데 거기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드로잉은 100만원, 페인팅은 2,000만~3,000만원 선이다.
“작업실에 쌓아놓은 그림이 1,000 점은 될 겁니다. 그런데도 그릴 소재는 아직 무궁무진해요.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그림쟁이인 모양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리는 게 마냥 재미 있으니까.”
전시는 다음달 21일까지 계속된다. (02)730-0030
조윤정 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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