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보험회사가 ‘영어 실력이 좋은 직장과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가?’를 주제로 서울 초등학교 어린이 회장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본 결과 63.8%가 ‘매우 그렇다’, 26.2%가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90%가 ‘성공에는 영어가 필수’라고 본다는 얘기다. 영어로 말하면 승자독식도 이런 승자독식이 없다.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지금처럼 한 언어가 세계어로서 유일무이한 패권을 누린 경우는 없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국제적인 외교언어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프랑스어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자연과학을 포함한 학문영역에서는 독일어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라틴어는 17세기까지 유럽의 진정한 세계어였지만 동양권과는 무관했다. 좀더 올라가면 기원 전후로 그리스어,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아람어, 아카드어 등이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때 국제어 노릇을 했다.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교의 확산과 더불어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아랍어가 널리 사용됐다. 반면 동양권은 산스크리트어와 한문이 일부 공동문어(文語) 역할을 했을 뿐 몽골어를 포함해 그 어떤 언어도 서양에서와 같은 세계어 내지 국제어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19세기 들어 프랑스어와 경합을 시작한 영어는 200년 만에 그야말로 세계를 완전 제패했다. 특히 인터넷과 위성방송 등 정보기술(IT) 발달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학술과 신문, 방송 등 미디어, 영화와 음악을 비롯한 대중문화는 영어 절대우위를 확대 강화하는 촉매가 되고 있다.
지난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유럽연합(EU) 정상회담장에서 프랑스 경제인이 영어로 연설하자 ‘삐져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예전 같으면 ‘역시 프랑스인다운 모국어 사랑’이라고 평가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앞에서 영어가 필수라고 했지만 사실은 양자택일이다. “익사할 것이냐 헤엄칠 것이냐”의 선택이라서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필요 여부나 정도를 가리지 않고 너나없이 너무나 많은 시간을 영어에 쏟는 사이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안타까움을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문학사가인 발터 옌스는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독일인들은 20년 안에 제대로 된 독일어도, 제대로 된 영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개탄으로 표현했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