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취해 사는 남자 최종규(31). 그는 공짜로 신문 10가지를 모조리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2년간 신문배달을 했고, 14년째 전국의 헌 책방을 구석구석 찾아 다니는 중이다. 그의 직장은 ‘헌책방’이나 다름없다.
대학 때 그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그런 그가 ‘헌책방 마니아’가 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의욕 없던 전공’은 최종규씨를 헌책방에 미치게 만든 일등공신. 1994년 한국외국어대학 네덜란드어과에 진학한 그는 큰 꿈만큼이나 의욕이 넘쳤다.
대학에서는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기대는 몇 번의 전공수업으로 무참히 깨졌다. 틀에 박힌 교재와 지루한 주입식 교육은 중ㆍ고등학교 수업의 연장이었고 대학을 계속 다녀야 할 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한 학기도 채 마치기 전 일이다. 독학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자퇴 하겠다고 나섰다가 부모님에게 끌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할 수 없이 원치 않던 수업을 5학기나 들어야 했다. 대신 도움이 될 만한 수업 외에는 학교 도서관과 구내 서점에서 죽도록 책을 읽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이라도 꾸준히 각종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늘 부족함을 느낀 그는 결국 1996년 학교를 그만두려고 집을 나왔다.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매일 발행되는 신문을 공짜로 모두 읽을 수 있다는 혜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신문은 새벽 2시 30분부터 2시간동안 돌렸다. 그리고 막 나온 신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우리말 모임 온라인 사이트를 만들어 틈틈이 우리말과 책, 헌책방에 관한 이야기를 올렸다. 그리고 매일 빠짐없이 1시간씩 헌책방을 돌아다녔다. 이런 생활은 2년간 계속됐다.
“신문배달은 평생 하고 싶을 정도로 잘 맞았어요. 기자를 하면서 밤에는 신문배달을 하면 최상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같이 일하던 직원들의 게으름을 봐줄 수가 없어 그는 2년만에 터전을 바꾸기로 했다.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출판사에 취직했지만 밤샘작업을 해도 근무 시간 외 수당을 주는 일이 없었다. 비합리적인 것 투성이었다. 다른 출판사로 옮겨봤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왔다.
그가 헌책방이란 곳에 처음 간 것은 고 2때다. 인천에 살았던 그는 절판된 참고서를 찾으러 헌책방을 돌아다녔다. 그곳에 수북이 쌓인 보석 같은 책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때부터 1주일에 2번씩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버릴만한 책은 한 권도 없었다.
그는 지금 아동문학가이자 국어학자인 고 이오덕 선생이 살았던 충북 충주 무너미 마을에 살고 있다. 이 선생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교육자. 대학 때 이 선생이 쓴 ‘삶과 믿음의 교실’을 읽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이 선생이 타계한 후 인터넷 사이트에 추모의 글을 올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의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머물 집을 제공할 테니 이 선생의 원고와 책 갈무리하는 작업을 맡아 달라고 했다. 요즘 그는 그 일에 몰두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도 완성할 수 없을지 모를 정도로 양이 엄청나다. 지금껏 정리된 것만도 100권이 넘을 정도다.
“온갖 책들을 봤던 게 정리하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수가 없어요. 이 선생님 원고를 정리 하다 보면 그 안에 또 제가 안 읽은 책 얘기도 많이 나오는 데 그것들을 일일이 읽으면서 계속 공부를 해요. 모르는 것을 깨닫는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여전히 헌책방은 꾸준히 간다. 충주에는 헌책방이 없어 매주 목요일 서울로 올라온다. 최씨는 그간 헌책방에서 어마어마한 책을 사서 읽었다. 단돈 3,000원에 보석들을 살수 있다니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꽂힌 책도 3만5,000권은 족히 되는 것 같다.
이쯤해서 그의 헌책방 예찬을 들어봤다. “쉽게 말해 새책방은 ‘돈이 되는 책이 모이는 곳’이고 헌책방은 ‘팔리는 책이 모이는 곳’이에요. 헌책방은 주인이 돈을 주고 직접 사오기 때문에 팔리지 않는 책은 갖다 놓을 수가 없지요.” 그는 또 사람냄새가 나고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말한다.
책을 사든 안 사든 반갑게 사는 얘기를 주고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주인들,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려 애쓰는 그들의 따뜻함에 늘 감동을 받는다. 헌책방을 꾸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삶을 배웠다.
전국의 헌책방을 전부 가보지 못한 게 그는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새책방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헌책방엔 도무지 사람이 몇 없어요. 헌책방 마니아가 적고 그곳이 아직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우리가 문화 후진국이란 뜻이죠. 헌책방에 한번 가보세요. 몇 천 원만 들고 가도 좋은 책을 구할 수 있다니까요.”
그는 신문배달과 출판사, 책을 써내 지난 7년간 모은 4,900만원으로 몇 년을 살았다. 이제 그 돈도 거의 바닥났다. 그래도 어김없이 헌책방에 가서 사고 싶은 책 몇 권을 샀다. 기자에게?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에게 있어서 새 책은 빳빳하게 갓 발행된 책이 아니라 그가 읽지 않은 모든 책이다.
“책 사는 데는 돈을 안 아껴요. 읽고 싶은 책은 꼭 읽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최종규씨는 15년째 ‘우리말운동’도 해오고 있다. 말할 때 쓸데없이 멋 부리거나 어렵게 쓰지 말고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쓰자는 것이다. “편하고 가볍게 쓰자는 겁니다. 초등학생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말을 써야죠. 같은 말이라도 어려운 말만 쓰려는 사람들을 보면 참 별로에요. ‘말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는 지난 2004년 5월부터 1년간 서울의 헌책방에 다닌 얘기를 묶어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이라는 895쪽 짜리 두꺼운 책을 냈다. 2004년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너무 두꺼워서 질린다고요? 그럼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으세요.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으시고요. 책이라고 해서 모두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이오덕 선생의 작업만도 엄청나니까. “이 일을 물려줄 후배를 찾고 있어요. 돈벌이도 안 되고 더디고 힘든 일이지만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죠.”
그는 이곳, 충북 충주에 곧 대안학교 ‘이오덕 학교’를 세워 선생이 못다 이룬 우리말 사랑을 이어갈 계획이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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