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노르망디 반도에서 바로 코앞의 바다에 망키에(Minquiers)와 에크레호(Ecrehos)라고 불리는 무인 암초군(巖礁群)이 있다. 1259년의 파리조약에서 영국 왕 헨리 3세는 노르망디 반도에 대한 모든 주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파리조약은 물론 1360년의 칼레조약에도 두 암초군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당연히 노르망디 반도에 부속된 섬이라고 여기고 아무런 행정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반면 19세기 들어 어업 가치를 인식한 영국인의 이용이 시작됐고, 그와 관련해 영국 정부의 다양한 행정조치가 행해졌다.
■1953년 11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에 대한 영유권 분쟁 판결에서 영국의 손을 들어 주었다. 프랑스의 ‘역사적 정통성’ 주장보다는 근대 들어 영국이 취해 온 실효적 점유의 증거를 중시했고, 프랑스가 영국의 조치에 대해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던 것을 일종의 영유권 포기라고 보았다.
ICJ의 이 판결은, 스페인이 미국에 할양한 팔마스섬에 대해 네덜란드의 영유권을 인정한 ‘팔마스섬 사건’ 판례(1928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와 함께, 국제법도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전 가나가와(神奈川)대 교수는 1978년 ‘조선연구’에 실은 논문에서 위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밝혔다. “물론 독도문제는 문제가 된 시간의 길이, 제국주의 침략 도중의 사건이란 점 등에서 망키에와 에크레호 사건과는 다르다.
그러나 재판관에게 이런 차이를 구별할 감각이 없다면, 한국인이 영유권 유지를 태만히 했다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일본 총리의 “독도는 일본 땅” 발언으로 한일 양국이 한창 독도논쟁을 벌이던 때였다. 그는 한국에 ‘차분한 대응’을 충고한 셈이다.
■그는 ‘조선의 자본주의 형성과 전개’ ‘동학사’ ‘조선사의 얼개와 사상’ 등의 명저를 남긴 한국사 전문가였다. 전공과 동떨어진 국제법 관련 언급은 고 이한기 전 서울대 교수의 ‘한국의 영토’(1969년)에 기댄 것이었다.
정치나 시류와 무관하게 진실을 보려고 했던 ‘학자적 양심’이 가장 큰 버팀목이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한국경제사 전문가인 호리 가즈오(堀和生) 교토(京都)대 교수도 1987년에 발표한 논문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에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지지했다. 독도문제가 시끄러울 때마다 사진으로만 본 두 사람의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생각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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