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드렁, 뿌루퉁, 무덤덤…. 최근 경복궁에서 마주친 중고생들은 어이없게도 무표정했다. 꽃피는 봄날 고궁에서 현장체험학습 중인 10대들의 얼굴에 웃음도 호기심도 활기도 없다니.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큰소리로 상스런 말을 주고받는 몇몇 학생들에게 관람객들이 곱지않은 눈길을 보내도 아랑곳없이 떠들거나 이리저리 밀치며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에 몹시 착잡?다.
● 재미없고 의례적인 체험학습
어느 교사 모임에서 “컴퓨터나 텔레비전, 심지어 휴대전화로도 체험학습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데 까짓 고궁이나 박물관이 무슨 대수겠냐”는 중견 교사의 이야기에 다른 교사들도 고개를 끄덕끄덕. 체험학습은 “1년에 한두번은 관례고, 따분한 교실수업에서 해방되는 기회”라고 했다. 재량활동, 특별활동,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나 학기말 자투리 시간을 비교적 손쉽게 ‘처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단다.
우리 학생들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명시된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나 ‘놀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구나. 아니, 대학입시의 압력 때문에 거의 집단학대 당하는 수준 아닌가. 모처럼 몸과 마음을 쉬며 생생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현장학습마저 이 지경이라니. 세계적으로 소문난 교육열의 그늘에서 허물어지는 우리 공교육의 현주소 아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교육부문 투자 효율성이 27개국 가운데 17위라는 조사결과는 결코 놀랄 일이 못된다. 중등교육 성취도는 2위라지만 공교육 아닌 사교육 때문이다. 그 와중에 우리 아이들의 표정은 속절없이 시드는구나.
몇년 전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의 휴런고등학교 현장학습에 동행했다. 스페인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디트로이트 박물관에 가는데 학부모 도우미가 필요하다는 가정통신문을 받고 참가한 학부모는 스무명 남짓. 각자 책임지고 인솔할 학생 예닐곱명과 서로 인사하며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박물관에 도착하자 반갑게 맞으면서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초대형 벽화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설명해준 안내원들은 박물관측이 철저하게 교육시킨 자원봉사자들.
스페인어를 위한 수업의 일부지만 기꺼이 따라나선 미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생들은 벽화에서 각자 원하는 부분을 그렸다. 두어시간쯤 자유로이 박물관을 관람한 뒤 버스에 오른 학생들의 활기찬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생들 주변을 맴돌며 이야기 나누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던 학부모 도우미들 역시 학생들 못지않게 흐뭇한 눈치였다. 학교에 돌아와 각자 새로 발견하고 느낀 점들을 스페인어로 정리해 발표하면서 흥미진진한 토론으로 마무리된 현장학습. 살아있는 통합교육의 힘을 새삼 실감케 했다.
● 외국의 활기찬 현장학습과 대조적
교사의 철저한 준비, 학부모의 적극적 참여, 그리고 방문하는 기관의 다양한 교육지원 인프라는 선진국 체험학습 현장의 공통점이다.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라며 체념해야 할까? 태양열에서 청정에너지를 얻듯이,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는 우리네 교육열을 슬기롭게 담아내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어디 가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건강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킬지 고민하며 준비하는 교사, 안전하고 질서있게 학생들을 인솔하고 소규모 그룹활동을 돕고자 기꺼이 나서는 학부모, 교사와 학부모를 위한 강좌나 워크숍을 마련하고 흥미진진한 영상물이나 실험 관찰 프로그램으로 체험학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들을 제공하는 박물관 자연생태공원 공연장, 이들이 시너지효과를 내도록 지원하는 교육당국. 시험공부에 지치고 자극적 게임에 빼앗긴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묘수가 보인다. 기막히게 재미있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호기심 어린 눈빛과 발견의 기쁨을 되살릴 수 있는 현장이야말로 교실수업까지 21세기에 걸맞게 바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김경희ㆍ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세계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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