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검정로를 타고 북악터널 방향으로 가다가 북한산국립공원 형제봉매표소 쪽으로 접어들면 고급 주택단지가 나타난다.
벚꽃과 개나리가 늘어선 산복도로 곁에 외국영화에서나 볼 법한 널찍한 정원의 고급 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이곳이 1970~80년대 서울의 베버리힐스로 불리던 종로구 평창동 400~500 번지 일대 주택단지다. 평소 오가는 사람도 드물어 호젓한 이곳이 최근 개발 논란으로 시끄럽다.
“정부가 택지로 땅을 분양해놓고 집을 못 짓게 하는게 말이 됩니까.”
18일 북한산 등산을 하고 내려오던 공갑준(71)씨는 주택가 곳곳에 이빨 빠진 것처럼 빈 터를 가리키며 열을 올렸다.
평창동에서 26년을 살았다는 그는 서울시의회가 14일 이곳에 남아있는 원형택지(택지로 분양했지만 이후 녹지보존을 위해 건축을 제한한 땅)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 조례안을 개정한 것을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반겼다.
선친 때부터 이 지역에서 부동산 중개소를 운영해 왔다는 송해명(52)씨는 평창동 주택단지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일관성 없는 정책을 비판했다.
“이곳은 1968년 김신조 청와대습격 사건이 나자 ‘산에 민가를 지어 공비들이 쉽게 침투할 수 없게 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30여만평 규모의 택지로 조성돼 1974년 민간에 분양된 곳이에요. 그런데 2000년부터 서울시가 난데없이 조례를 제정해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 겁니다.”
서울시는 북한산 녹지보존을 위해 2000년 7월 ‘전체 면적 중 나무가 있는 면적(입목수본도)이 51% 이상이거나 경사가 21도 이상인 땅은 지목이 대지라도 집을 짓지 못한다’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해 더 이상의 개발을 막고 있다. 현재 전체 택지 가운데 5만여평이 원형택지로 묶여 있다.
그러자 2000년 이전에 집을 지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집을 헐고 새로 지을 수 있지만, 나대지로 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재산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형평성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민원과 소송이 잇따르자 시의회는 14일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돼 계획을 수립한 지역은 입목수본도와 경사도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례개정안을 통과시켜 사실상 개발의 길을 터줬다.
땅을 가진 주민들은 집을 짓는 것이 녹지보존에도 더 효과적이라는 입장이다. 한 주민은 “입목수본도를 낮추기 위해 나무를 고의로 고사시키는 땅주인도 있다”며 “정원이 딸린 고급주택지로 개발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공인중개사 송씨도 “이곳은 1종 전용주거지역이자 자연경관지구이기 때문에 집을 지어도 건폐율 30%, 용적률 60%를 넘지 않는다”며 “건축허가를 내줘도 난개발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조례안 개정이 북한산 자락의 산림훼손을 가속화할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울환경연합 이철재 운영국장은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의회가 선거를 앞두고 무분별한 선심정책을 펴고 있다”며 “이 일대의 환경보전과 재산권침해 문제는 차기 의회에서 심도 깊게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시 김호섭 시설계획과장은 “대상지 5만여평 가운데 현재 도로와 주차장, 쓰레기 적치장 등으로 사용되는 땅을 빼면 녹지로 볼 수 있는 공간은 1만7,000여평”이라며 “이 가운데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녹지는 향후 지구단위계획 수립 과정에서 개발을 제한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과장은 실제로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는 땅을 5,000평 규모로 추정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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