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씨의 첫 소설집 ‘강산무진(江山無盡ㆍ문학동네 발행)’의 문장들은 세상의 ‘헛것’들을 걷어내고 ‘실체’에 다가서기 위해 힘겹게 몸부림친다. 소설들은, 그 과정에서 배어나오는 ‘기갈이나 허기’, 끝내 ‘설명되지 않는 결핍’의 기록이다. 95년 첫 장편(‘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이래 그는 그 일관된 기록으로 하여 여러 문학상(이상ㆍ동인ㆍ황순원 문학상)을 잇달아 탔고, 이 책에는 그 가운데 두 편의 수상작(‘화장’ ‘언니의 폐경’)이 실려있다.
‘화장’(火葬)은 아내의 투병과 사망, 장례의 과정을 지켜보고 치러내는 중년 남자의 병든 몸과 그 몸 속에 내장된 날 것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당신의 산도(産道)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너무 멀어서, 저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등 푸른 생선이 빛으로 빛나면서 또다른 색조를 몰고 오는 광고 속의 지중해보다도, 아내의 뇌수 속에서 빛나는 종양의 불빛보다도, 그곳은 더 멀어 보였습니다.”(78쪽) 작가는 그 ‘확실히 존재하는 닿을 수 없는 것들’에의 결핍과, 죽음이라는 확실하고 개별적인 생명현상, 화자(‘나’)가 결코 놓여날 수 없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병치한다.
그의 문장의 몸부림은 몸의 가장 진실한 반응이라 해도 좋을 감각(후각, 시각 등)의 힘으로 구르며 지탱한다. 그 감각은 노을, 저녁, 바람, 하구, 썰물, 질병, 죽음, 환영(幻影) 등 대체로 무겁고 어둡고 깊은 이미지에 닿아있어, 그의 소설은 대체로 스산하다. “환영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고 휑하니 빠져나간 세월의 빈 자리가 허허로웠다.”(‘언니의 폐경’ 241쪽)
그의 소설이 대체로 실하게 서는 것은 그 완연한 ‘허허로움’이 ‘세속의 힘’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둘은 긴장하면서도 결코 서로를 야멸차게 밀어내지 않으며, 소설 속 인물들은 그 허허함 속에서도 끝내 밥벌이의 지겨움을 빈정대지 않는다.
“뛰고 또 뛰어서 뛴 만큼만 벌어먹고 산다는 일은 잔혹했지만 선명했다.”(‘배웅’ 20쪽)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의 무게’(‘언니의 폐경’ 230쪽)를 생각하는 그들은, ‘실체’라는 것도 결국 ‘헛것’에서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음을 안다.
“자금은 실체가 없이 안개처럼 흘러다니는 허깨비였지만, 그 허깨비는 숨쉬는 목통을 조이는 오랏줄이었다. 오랏줄이 허깨비같기도 했고 허깨비가 오랏줄 같기도 했다.”(‘항로표지’ 113쪽) 그러므로 “소설은 시정잡배가 쓰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적어도 그의 경우에는, 위악(僞惡)적인 수사가 아닐 것이다.
그는 책 뒤에 “늙은 江의 하류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었다”고, 이제 “江을 거슬러서 上流로 가려 한다”고 썼다. 한 데 지려 앉아 그 곳이 세상 전부라 아는 이들 틈에서, 그의 고백은 신선하다. 상류에서 건져올릴 그의 문장이 기다려진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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