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프랑스군 당국의 정치적 계산과 프랑스인의 집단적 편견이 드레퓌스 대위를 간첩으로 몰아 처벌한 사건을 고발한 에밀 졸라의 일갈이다.
1898년 프랑스군 당국은 독일군에 대한 패전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다가 참모본부에서 암약하는 스파이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말미에 기재된 서명자는 ‘무뢰한 D’. 참모본부의 장교명단을 살피던 방첩대원은 ‘드레퓌스’란 이름을 발견함과 동시에 탄성을 지른다. ‘바로 유대인이었군.’ 당시 프랑스는 군대 내 유대인이 국익을 파괴한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 국익의 이름으로 진실 은폐
이때부터 ‘유대인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포장하기 위한 증거가 조작되었고, 드레퓌스 주변 동료들은 ‘어쩐지 수상한 유대인이었다’고 증언한다. 재판 시작 이전부터 유죄결론을 내리고 있던 군사법원은 유일한 증거인 편지와 드레퓌스의 필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남의 필적으로 가장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편지 내용과 다른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스파이라면 그 정도 알리바이는 만들 줄 알아야지’라고 몰아세웠다.
변호인의 어떤 반박도 재판부의 유죄 심증을 되돌릴 수 없었고, 드레퓌스는 ‘나는 무죄입니다’라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유배지로 떠났다. 실제 스파이 ‘무뢰한 D’가 체포되었으나 국익과 군부의 위신을 위해 진실은 은폐되어야만 했다.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는 “국익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오늘 국익이 드레퓌스를 쳤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라며 항거했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드레퓌스 사건 조작 음모를 폭로했지만 중상모략 죄로 처벌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드레퓌스를 석방하는데 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진실 앞에 대한민국은 떳떳한가. 1982년 9월 안기부는 전 공화당 중앙상임위원, 대학교수, 공무원 등 29명의 인텔리로 구성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이름하여 ‘송씨 일가 사건’. 신문들은 60년대 북한의 대남공작부 간부인 송창섭이 수차례 남파되어 가족과 친인척을 간첩으로 만들어 25년 동안 암약하게 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110일이 넘도록 간첩임을 입증하는 난수표 한 장 발견하지 못한 채 12명을 구속했다. 유죄의 증거는 자백뿐이다.
가족 면회는 10개월 후에야 가능했고, 변호인 접견도 수개월이 지나서 이뤄졌다. 피고인들은 첫 재판부터 사건이 안기부의 모진 고문에 의해 전면 조작되었다고 항변하였다. 손톱 밑을 기다란 침으로 찌르는 등 소름 끼치는 온갖 고문 만행이 그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담당변호사는 안기부에 1주일 동안 감금당한 채 고문 주장을 하지 말 것을 강요받았다. 2년이 넘는 재판 기간에 고등법원과 대법원이 각각 3번씩 다시 판결을 할 정도로 사건은 의혹투성이였다.
대법원이 두 차례나 무죄라고 돌려보낸 것을 고등법원이 거듭 유죄를 고집하여 확정되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 간첩조작사건 진실 밝혀내야
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간첩 공포를 이용했다는 주장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당시는 정권안보가 국익으로 포장되던 시기였다. 이 사건으로 피고인들과 그 가정은 완전히 파탄 났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국익’이란 미명 하에 조작 간첩이란 꼬리표를 달고, 당사자들의 원한과 함께 지하에 묻힌 사건이 너무도 많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 국익과 진실의 줄다리기를 경험하고, 이성을 잃은 국익이 얼마나 광폭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면, 이제 지하에 묻힌 진실들이 무서운 힘으로 폭발하기 전에 하나씩 밝혀내고 위무해야 할 것이다.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역할이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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