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남녀는 단 한 번 면담 기회를 가진 후 결혼 서류 ‘밀카’에 서명한다. 낭만적 데이트를 꿈조차 꿀 수 없는 이 나라에서도 가슴 설레는 사랑이 과연 싹틀 수 있을까.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아랍판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불리며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을 휩쓸고 있는 소설 ‘리야드의 소녀들’은 ‘당연하다’고 답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6일 “소설의 작가인 25세 치과대학 여학생 라자 알 사니(사진)가 사우디 사회에서 주어진 삶과 사람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 여성들의 삶을 재기 발랄하게 묘사했다”면서 “이 소설이 종교 경찰과 인터넷 채팅이 공존하는 혼란 속에 있는 아랍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부유한 집에서 자란 4명의 20대 여주인공들은 값비싼 옷을 즐겨 입고, 영어를 섞어가며 농담을 하고, 축하할 일이 생기면 샴페인을 터뜨린다. 게이 아들을 데리고 사는 아주머니 움 누와이어의 집은 이들이 마음껏 속내를 터놓는 아지트다. 그러나 미국 드라마 ‘섹스&시티’를 논하는 신세대 아가씨들에게도 이슬람 여성으로서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라미스는 시아파 남성과 남몰래 사랑을 싹 틔워 가다 수니파 종교 경찰에 들켜 혼쭐이 난 뒤 눈물의 이별을 겪는다. 또 다른 친구 사딤은 ‘밀카’ 에 서명한 뒤 미래의 남편과 TV에서 본대로 로맨틱한 밤을 보내는 데 성공한다. 약혼자는 그러나 영화와 달리 종교적 죄책감으로 인한 스트레스 탓에 파혼을 선언하고 잠적해버린다.
이 소설은 지난해 9월 레바논에서 첫 선을 보였지만 남성이 여성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금지돼있는 사우디에서는 즉각 출판이 금지됐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소설을 접한 젊은이들이 책 수만 권을 암시장에서 입수해 서로 돌려보고 블로그 등에도 퍼뜨리면서 작가 알 사니는 스타로 떠올랐다. 판금 조치가 오히려 기름을 부은 격이 되자 사우디 정부도 지난달 두 손 들고 출판을 허락했다.
알 사니는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 겪는 일들은 친구들의 실제 경험을 각색한 것”이라며 “금지됐던 주제들을 논의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다. 6년 전 취미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며 다음 소설도 구상하고 있다.
FT는 “무엇보다 이 소설은 위성 TV, 인터넷, 휴대전화 등으로 인해 남녀 관계의 패러다임이 뒤집히고 있는 사우디 사회의 변화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논평했다.
알 사니의 팬이라는 한 사우디 남성은 FT와의 인터뷰에서 “4~5년 전만 해도 이 같은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했겠지만 지금은 약간의 논쟁이 오가는 정도”라며 “누구도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정조 장려 위원회’ 등 정부 기관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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