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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 별세/ 삶이 곧 영화…한국 영화계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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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 별세/ 삶이 곧 영화…한국 영화계의 황제

입력
2006.04.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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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황제’였다. 그는 제작자로서 한국영화 산업화의 큰 틀을 마련했고, 감독으로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영화들을 연출해 한국영화가 질적 성장을 이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26년 함북 청진에서 태어난 신 감독은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와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46년 고려영화협회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군사 영화 ‘출격명령’의 제작에 참여했던 그는 52년 ‘악야’로 감독 데뷔식을 치렀다.

‘악야’는 취객의 눈에 비친 양공주의 삶과 애환을 통해 남북 대치의 아픔을 조명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그는 53년 당대 최고의 스타 최은희씨와 화촉을 밝히며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 ‘무영탑’(57) ‘동심초’(59) ‘로맨스 빠빠’(60)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감독의 입지를 굳혔다.

신 감독이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른 것은 61년이다. 그는 1월18일 구정 대목에 최은희씨가 주연한 ‘성춘향’으로 홍성기 감독, 김지미씨 콤비의 ‘춘향전’과 맞대결을 펼쳤다. 국내 최초의 시네마 스코프(총천연색 대형화면) 영화라는 호기심과 함께 인기 정상의 두 스타가 맞붙은 이 한판 승부는 장안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성춘향’이 74일간 명보극장 한 곳에서만 38만 관객을 끌어 모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신 감독은 김기영 유현목 감독과 함께 60년대 한국영화 ‘디렉터 트로이카’ 시대를 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1) ‘연산군’(61) ‘폭군 연산’(62) ‘빨간 마후라’(64) 등 우리의 정서와 역사가 담긴 영화를 연출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신 감독은 제작자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52년 설립한 신상옥프로덕션을 61년 9월 신필름으로 개칭한 후 63년 안양촬영소를 인수, 주먹구구식 제작을 일삼던 한국영화계에 기업화 모델을 제시했다.

신필름은 75년 11월 간판을 내릴 때까지 23년 동안 224편의 영화를 만들며 국내 대표 영화사로 군림했다. 신필름은 제작자 황기성 김갑의, 감독 임원식 이장호, 배우 신영균 남궁원 신성일 등을 발굴해 우수 영화 인력의 산파 역할도 톡톡히 했다.

70년대 한국영화계가 불황을 맞이하고 당시 정권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신 감독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78년 납북사건은 되려 그의 영화인생에 전화위복이 됐다. 그는 북한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필름을 새로 설립, 최은희씨에게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소금’(85)을 비롯해 ‘돌아오지 않는 밀사’(84) 등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86년 북한 탈출 이후에도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90년 KAL기 폭파 사건을 다룬 ‘마유미’를 미국과 일본에 각각 250만 달러, 123만 달러를 받고 수출해 건재를 과시했다.

92년에는 할리우드에서 ‘닌자 키드’를 제작해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94년 프랑스 칸영화제 심사위원, 2002년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신 감독은 2003년 안양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 석좌교수로 일하며 말년에는 후배 양성에 힘썼다. 2002년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제작하는 등 마지막까지 창작열을 불태웠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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