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노천극장에서 ‘성춘향’을 본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영화의 명성은 궁벽한 시골 마을까지 흔들어 놓았다. 춘향 역인 최은희의 자태도 아리따웠지만, 방자 역인 허장강의 능청스럽고 느물느물한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감독이 신상옥이었다는 것은 중학생이 된 후에나 안 것 같다. 언젠가부터 그 이름 앞에는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스케일이 큰 사극 영화나 대중에게 친숙한 소재, 주요 소설들을 즐겨 감독한 그에게 사회가 붙여준 명예로운 호칭일 것이다.
▦ 그는 독자적인 영화미학을 추구한 작가주의적 감독이기보다, 대중과 호흡한 감독ㆍ제작자로서의 이미지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독한 몇 영화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뚜렷하다. 깔린 사연이 기구하기 때문이다. 북한 출신인 부인 최은희씨가 1978년 납북되고, 6개월 뒤엔 그도 납북되기에 이른다. 그는 납북이라고 주장하나 월북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 부부는 86년 탈출하기까지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심청전’ ‘불가사리’ 등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같은 실화였고 비극이었다.
▦ 이 부부가 탈출할 때 가져온 북한 영화를 비밀관람하는 것이 한 때 신문사 내부의 문화행사였다. 이준 열사를 조명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최은희씨가 직접 출연한 ‘소금’을 볼 수 있었고, ‘불가사리’는 후에 정식 북한영화 1호로 극장에서 상영되고 비디오로도 보급되었다. 앞의 두 영화는 역사적 울분과 휴머니즘이 깔린 모범적 영화였고, ‘불가사리’ 역시 소박한 액션물이었다. 제작과정부터 관람, 극장 상영까지 모두 기구하기만 한 7편의 영화는 결과적으로 영화사에서 희귀하고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 신 감독은 비밀녹음한 김정일의 육성을 통해 북한영화의 고민을 전해주기도 했다. “소련은 미국ㆍ서독ㆍ영국과 합작해 기술을 도입하는데, 우리는 남북이 대결하고 있어 자본주의 국가에는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남의 것과 대비할 줄도 모르는 바보들입니다.” 신 감독은 영화만을 생각하며 시대마다 자신의 발자취를 뚜렷이 남긴 영화인이다. 고난도 많았던 생애에서 부인을 북한에서 탈출시키던 86년 3월의 그는 역사의 주연배우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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