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하지 않고 여태 브루스 윌리스의 팬으로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은 늙어가는 그에게서 ‘사나이 된 자의 비애’를 본다. ‘다이 하드’의 화끈한 액션스타에서 탈피해 최근 몇 년간 ‘아마겟돈’ ‘호스티지’ ‘신시티’ 등을 통해 잇따라 선보인 희생하고 패배하는 영웅의 이미지는 사나이 된 자의 비애, 더 구체적으로는 ‘아비 된 자의 비애’를 환기하며 그로 하여금 ‘몰락함으로써 승리하는 영웅’이라는 자기만의 영토를 확보하게 만들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초로의 퇴락한 경찰로 등장하는 액션 스릴러 ‘식스틴 블록’(원제 ‘Sixteen Blocks’)은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범죄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는 ‘다이 하드’ 시절의 날렵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포기하는 대신 인생이 회한으로 가득찬 한 남자의 초상을 그리는 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현명했다.
그가 백발 성성한 머리에 불룩 튀어나온 배, 절름거리는 다리, 보기만 해도 피로가 옮아올 것 같은 찌든 얼굴로 미간을 찌푸릴 때, 주름 살 사이사이 깊게 밴 삶의 권태와 절망은 누구라도 새로운 삶과 희망을 갈망하게 만든다.
한 때 잘나가는 경찰이었지만 경찰 내부의 위험한 커넥션에 의해 조직에서 낙오된 잭 모슬리(브루스 윌리스)는 아침에도 만취 상태로 출근하기 일쑤인 알코올 중독자다.
야근을 마친 어느날 아침, 그에게 증인으로 채택된 죄수 에디 벙커(모스 데프)를 법정까지 호송하라는 임무가 주어지고, 2시간 안에 16블록 떨어진 법정에 에디를 데려다 주기만 하면 그의 임무는 끝난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벙커가 경찰 내부조직의 비리를 폭로할 결정적 증인이었음이 밝혀지고, 비리사건에 연루된 잭은 증인 보호를 위해 벙커를 죽이려는 동료 경찰들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된다.
모슬리가 야근을 마친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의 두 시간을 거의 실시간으로 스크린 위에 풀어놓는 이 영화는 “날짜도 변하고, 계절도 변하지만 사람은 안 변한다”고 믿는 모슬리와 “소매치기였던 척 베리도 결국엔 좋은 사람이 됐다”고 주장하는 벙커의 우정을 통해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탐색한다.
왕년의 액션스타를 고대한 관객에겐 실망이겠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쓰럽게 쫓기던 모슬리가 희생을 통해 도리어 자기구원과 희망을 얻을 때 관객은 이 영화의 둔중하고 단출한 액션이 작정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리셀 웨폰’ 시리즈의 리차드 도너 감독. 20일 개봉. 15세.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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