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적과의 동침’은 파멸로 끝난다. 원제 ‘Sleeping with the Enemy’, 1991년 봄 미국에서 개봉됐다. 줄리아 로버츠의 어수선한 정서와 불안에 떠는 심리 연기가 인상적이다. 부자이고 미남인 남편과 결혼했으나 그의 결벽증과 의처증을 견디지 못해 ‘동침’에서 탈출한다.
새로운 사랑을 구했지만 남편이 다시 찾아오고, 결국 그를 살해한다. 완전범죄 형태로‘적과의 동침’에서 탈피하면서 일견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영화는 귀여운 여인이 냉혹한 살인자로 변하기까지 몸과 마음이 어떻게 부서지고 황폐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어떤가. BC 500년 전후, 중국 춘추시대 앙숙인 오ㆍ월나라의 얘기다. 양국은 대를 이어 숱한 전쟁을 벌였는데, 오왕은 패했을 때 굴욕감을 잊지 않으려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와신ㆍ臥薪) 복수의 기회를 노렸고, 월왕은 싸움에 졌을 때 짐승의 쓸개를 빨며(상담ㆍ嘗膽) 울분을 삭였다.
병법가 손자(孫子)는 “설사 이러한 오ㆍ월나라의 국민이 한 배에 탔더라도 풍랑을 만나면 협력해야 한다”고 했다. 육지에 이르러 죽기 살기로 싸우더라도 공동의 위기에는 일단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만고불변의 손자병법 진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적과의 동침인가, 오월동주인가. 미국이 의처증에 찌든 남편일 수 없으며, 한미관계가 오ㆍ월과 같은 앙숙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양국이 동침(sleeping together)상태로 동주(同舟)상황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부가 FTA 추진을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270개 시민단체가 범국민적 저지운동을 선언했다.
몸도 마음도 결국엔 만신창이가 될 것이라며 반대하는 ‘적과의 동침론(論)’, 글로벌경제 파도 속에 양국의 공생을 주장하는 ‘오월동주론(論)’이 비등하다. 팽팽한 시각차는 공감대가 적다는 증거다.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가 있다. 경쟁 시장에서 두 기업(혹은 몇몇 기업)이 서로 상대의 장점을 끌어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협약을 맺어 시장에 있는 제3의 기업들보다 높은 경쟁력을 공유하는 전략이다.
당사자간 적대관계가 해소되므로 ‘전략적 파트너십’이라고도 한다. FTA 논란에서 적과의 동침이나 오월동주를 들먹이는 것보다 전략적 파트너십을 이야기하는 것이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어 보인다. FTA는 양자간 문제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등 제3의 경쟁국을 전제하는 다자간 논의의 측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병진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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