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90일간의 의회 협의기간 동안 한국과 공식 FTA 협상을 할 수 없지만 내부적으로 철저히 준비합니다. 사업가 노동자 비정부기구 등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구하고 협의합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웬디 커틀러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협상 미국측 수석대표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협상 개시를 선언한 2월3일 이후의 미국측 준비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국의 공직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류의 빈말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 의회와 정부, 관련기관이 해야 할 일과 그 일의 시한을 규정한 타임테이블에 맞춰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
미국측은 벌써 가속도가 붙었다. 부시 대통령과 의회의 관련 위원회가 협의채널을 가동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의회는 지난 달 대통령 직속 통상정책 및 협상에 대한 자문위원회가 준비한 두툼한 종합 보고서를 받았고, 얼마전엔 의회감독그룹을 구성했다.
본협상이 궤도에 오르는 여름에는 보고서가 쏟아진다. 국제무역위원회가 7월에 한국 수입품 비관세 조치에 따른 파급보고서를, 8월엔 미국 산업의 피해에 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한다. 부시 대통령도 타결시 개정할 해야 할 미국법에 관한 보고서를 8월에 낸다.
미국의 통상협상 전권은 의회에 있지만 2002년 발효된 무역법의 신속협상권한에 따라 2007년6월1일까지 행정부에 권한을 위임한 상태다. 그러나 행정부는 공식협상 개시 이후 90일 동안 의회와 함께 각계 여론을 수렴해 검토작업을 한다.
우리는 어떤가. 2주일에 한번씩 대외경제장관회의가 열리고, 재정경제부 차관을 중심으로 주간 점검 회의가 매주 소집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엇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타임테이블은커녕 믿음직한 보고서도 없다. 여론수렴조차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FTA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 하더라도 가뜩이나 불안해 하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미FTA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참여정부가 치적을 세우기 위해 FTA를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폭탄발언으로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 그룹이 친노와 반노진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또 한미 FTA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이념의 잣대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식 가두여론수렴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자칫 소모적 국론분열로 비화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아직까지 기자는 어느 쪽에 더 점수를 줘야 할지 모르겠다. 한미FTA를 맺으면 경제는 물론 전분야에 걸쳐 대한민국이 쌈박해질 것이라는 설명도 그럴싸하지만 93년 북미FTA 발효 이후 멕시코 경제가 더 곪았다는 실증적 분석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당시 IMF 관리체제를 거부하고 미국과 ‘맞짱’을 뜨곤 했던 말레이시아가 지난 달 미국과 FTA협상을 시작하며 미국의 중국 포위전략에 가세한 것을 생각하면 또 한번 마음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한미FTA가 약이냐, 독이냐는 논쟁은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여론을 수렴해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는 리더십을 확립하고, 협정 발효시 예상되는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능력을 겸비하는 것이 더 요긴하다.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미FTA를 추진하다 보면 온나라가 필요이상으로 피곤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FTA 1차 본협상 6월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다. 걱정이다.
김경철 경제부장` kc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