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월11일 홍콩의 한 해변가. 지인들과 함께 산책 중이던 한 50대 여인이 갑자기 나타난 장정들에게 번쩍 들려 보트에 태워진다. 보트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공포에 질린 여자는 반항하다 몇 차례나 마취제를 맞는다. 남지나해를 돌아 항해하길 8일. 북한 남포항에 도착하니 웬 키 작은 남자가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라며 악수를 청한다. 당시 북한 노동당 서기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흔히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로 묘사되는 ‘신상옥ㆍ최은희 납북사건’의 시작이다. 합작영화 제작을 논의하기 위해 홍콩에 간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북한영화 산업의 진작을 위해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 지시로 납북된 지 6개월 후. 전 부인이었던 최씨의 실종소식을 듣고 홍콩에 간 신상옥 감독은 7월19일 벤츠 승용차를 몰고 나타난 북한 간첩들에 의해 피랍돼 북한으로 납치된다.
그러나 이들이 북에서 재회한 것은 납치 5년 후인 83년 3월6일이었다. 북한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를 거부한 최씨는 4년 9개월간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고, 신 감독도 정치범이 수용되는 ‘제6감옥’에서 따로 머무느라 이들은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따로 수용돼 지내는 동안 신 감독은 네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갔다.
83년 다시 만난 이들은 “이제는 우리의 인생을 한 번 감독해보자”는 최씨의 제안에 따라 탈출 모의를 시작했다. 탈출 전까지 2년 4개월간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심청전’ 등 7편의 영화를 함께 만든 이들 부부는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가 동구권 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하면서 김 위원장의 신임을 얻게 된다.
1986년, 이들은 헝가리와의 합작영화 ‘칭기스칸’ 제작을 논의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에 영화의 서방 수출을 타진한다는 명목으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간다. 감시요원들에겐 ‘북한 영화를 서방에 팔기 위해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3월13일. 감시원을 따돌린 이들은 미 대사관 진입에 성공, 납북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미국으로 간 신 감독과 최씨는 그곳에 정착해 영화활동을 하다가 2000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일각에서는 최씨의 납북은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신 감독의 경우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영화사 등록을 취소당해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이 어려웠던 점 등을 들어 납북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증거도 없는 상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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