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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정치는 修辭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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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정치는 修辭라지만

입력
2006.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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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대지 위에 따뜻한 봄 햇살을 비추고 입을 맞추어야 한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지난달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해찬 당시 총리의 경질을 건의하며 했다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말인 것도 사실이다.

정 의장의 속생각을 캐자는 게 아니다.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으리라 믿는다. 내 주의를 끈 것은 정 의장의 수사학이다. 말로 하는 대화에까지 고개를 들이미는 그의 수사학 말이다. 글이나 대중 연설에 저런 말이 나왔다면, 그러려니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 의장이 이 말을 한 것은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면서다.

그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엔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만 배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거의 ‘독대’라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자리다. 이런 자리에서 저런 장식적 화법을 쓰고 있는 정 의장을 상상해 보라. “대통령님! 국민의 대지 위에 따뜻한 봄 햇살을 비추고 입을 맞추어야 합니다!” 부교감신경계에 탈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부자연스런 감성적·장식적 발언

정 의장은 대통령 한 사람이 관객인(이병완 실장까지 포함시켜도 관객이 두 사람 뿐인) 무대에서 연극을 했거나 연설을 한 것이다. 여느 사람이라면 저런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대통령님, 여론을 따라야 합니다.” 이 말이 정 의장 말보다 한결 깔끔하고 또렷하지 않은가? 정 의장은 왜 깔끔하고 또렷한 표현 대신 장식적이고 아리송한 표현을 썼을까?

가능한 추론은 둘이다. 첫째는 정 의장 말투가 원래 그럴 가능성이다. 둘째는 그 말을 대통령에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전 총리한테 화가 난 유권자들에게 했을 가능성이다.

대통령과 만난 뒤 우상호 당 대변인을 통해 이 말을 기자들에게 널리 알린 걸 보면, 두 번째 추론이 더 그럴 듯하다. 그러니까 정 의장은 대통령 집무실을 무대(연단)로 삼아 유권자들을 향해 공연(대중연설)을 한 것이다.

어쩌면 둘 다일지 모른다. 11년 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진지하고 공감 어린 진행으로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신 일급 방송 앵커 출신 정치인답게, 다중을 염두에 둔 감성적 장식적 발언은 정 의장에게 제2의 천성인지도 모른다. 유권자들도 정 의장의 이런 수사 취향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이 천성은 정치가 쇼비즈니스로 변한 이 오디오-비주얼 시대에 북돋아야 할 정치적 재능인지도 모른다. 그

러나 이렇게 알맹이가 빈약한 감성적 발언들이 우리 사회의 정치담론 수준을 초급 수사학 교실에 묶어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언설은 많은 부분을 수사학에 의지하게 마련이지만, 좀더 세련되고 성찰적인 수사학을 보고 싶다.

물론 알맹이 없는 구호에서 정 의장에게 결코 지지 않을 사람들이 한나라당에는 수두룩하다. 제게 정치적으로 불리하다 싶은 일만 생기면 난데없이 ‘국가정체성’을 되뇌는 이들을 보면, 내 어린 시절의 고장난 라디오가 떠오른다.

전류는 흐르는데 주파수 동조가 잘 안 돼 지지거리기만 하는 고물 라디오 말이다.

●주류 우파 슬로건엔 독설만 가득

이들은 ‘국가정체성 수호’를 외칠 뿐 그 국가정체성의 실속이 무엇인지는 살갑게 알려주지 않는다.

입만 열면 ‘민생’을 외치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 데는 결사반대다. 이들은 슬로건의 속살을 여권에 대한 독설로 채운다. 말이 독설이지 이들의 행태는 인격 살해에 가깝다. ‘치매’니 ‘등신’이니 하는 말이 예사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민주화돼 ‘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구나 하는 자기위안이 무참할 정도다.

세계 정치사에서 장식적 말투나 독설은 주로 좌파 세력의 기호품이었다. 지금 한국에선 이런 수사학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주류 우파 정치권에 주로 포진해 있다. 유일한 원내 좌파 정당인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발언이 외려 덜 장식적이고 더 기품 있는 것은 우리 정치 지형의 앞날에 축복일까 재앙일까?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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