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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스포츠와 정치

입력
2006.04.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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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히말라야산맥의 티베트사원에서 월드컵에 열광하는 수도승들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 ‘컵(CUP)’은 맑은 동화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열기가 히말라야 산자락의 사원에까지 불어 닥쳐 어린 수도승들이 엄격한 수행 중에도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벌이는 소동은 유쾌하면서도 은은한 감동을 자아낸다.

●스포츠는 정직ㆍ순수성의 상징

축구와 티베트사원의 수도승이라는 특이한 소재와 영화를 만든 감독과 출연자들 모두 수도승이란 점 때문에 많은 화제를 모았다.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키엔츠 노부는 부탄 출신의 불교지도자. 19세기의 티베트 불교지도자 키엔츠 왕포의 7대 환생라마로 공인 받은 인물이다. 영화를 공부한 적이 없으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리틀 부다(Little Buddha)’ 제작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문외한이 만들었지만 1999년 칸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월드컵에 빠져 수행을 게을리하는 듯한 동승에게 큰 스님이 화두를 던진다. “걷기 편한 길을 만들자고 땅 위에 가죽을 씌울 것인가?” 동승은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가죽신을 신지요.” 장난꾸러기 동승이 신통한 대답을 했다.

“그래 맞다. 가죽신을 신는 것이나 땅을 가죽으로 씌우는 것이나 매한가지니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는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수많은 적이 존재한다. 그 많은 적들을 없애기는 불가능한 일, 그대신 우리 마음 속의 미움을 없애버린다면 그 모든 적을 없애는 거나 매한가지가 아니겠느냐?” 큰 스님을 흡족하게 한 동승은 월드컵 구경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월드컵이 속세를 멀리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수도승들을 열광시킨 까닭이 무엇일까. 스포츠를 모르고 지내던 수도승들에게 낡은 수상기를 통해 접한 월드컵의 경기모습은 히말라야의 만년설처럼 정직하고 순수한 것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축구가 아닌 다른 스포츠를 접했더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리라 짐작된다. 스포츠란 본질적으로 종목에 상관없이 정직하고 순수하기에.

심장이 터지는 듯한 육체의 한계를 넘나들며 정신력의 극한을 시험하는 스포츠는 당사자는 물론 관전자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하다. 무기를 내려놓고 신체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장비만 갖춘 채 육체와 정신의 대결을 벌이는 스포츠에는 부정이나 술수가 끼어 들 틈이 없다.

대결구도를 갖고 있지만 공정한 룰이 적용되기에 참가자들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 스포츠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숭고한 의식 중 하나다. 오늘날의 스포츠는 어느 것 하나 민족 국가 정치권력 상업성에 오염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포츠 자체의 정직성과 순수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들이 쌓여가며 국민들이 열광하고 있다.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의 쾌거, 세계 주니어 피겨스케이팅 정상 등극,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등은 국민들을 살맛나게 했다. 미 프로풋볼(NFL) 스타 하인즈 워드의 어머니와 함께한 고국나들이는 스포츠 외적인 요소로 포장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역시 감동의 원천은 워드가 이룩한 스포츠 성과에서 나온 것이리라.

● 정치는 왜 조롱 대상이 되는가

그러나 스포츠는, 히틀러가 나치의 힘과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베를린올림픽을 이용하고 전두환 정권이 학살과 탄압으로 얼룩진 시대를 가리기 위해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유치했듯 국가와 민족을 내세운 권력에 이용당해 왔고 자본에 오염되어 왔다.

그렇더라도 스포츠의 정직성과 순수성은 훼손은 될지언정 부정될 수는 없다. 꼼수와 부정이 통하지 않는 정정당당한 겨룸이 스포츠의 생명이요 매력이다. 국민들이 이토록 스포츠에 열광하는 까닭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국내 정치로 시야를 돌리면 짜증을 느끼는 것도 스포츠에서 맛볼 수 있는 정직성이나 순수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참가한 대표팀 감독ㆍ코치진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조직력이 상찬의 대상이 된 것 또한 우리 정치의 무능과 부도덕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스포츠 하는 사람들의 반 만큼이나 정직성과 인내심, 노력하는 자세를 우리 정치인들이 지녔다면 정치가 이토록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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