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인생과 닮았다. 가장 큰 상처는 언제나 스스로 낸다.”
미국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일침이다. 스코틀랜드 호화 골프장 투어를 필두로 한 로비 의혹으로 톰 딜레이 전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가 정치무대에서 불명예 퇴진하면서 미국 정계에 골프주의보가 내려졌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딜레이는 골프의 좋은 이미지까지 끌어안고 진흙탕 속으로 뛰어든 듯 하다”며 “최근 로비스트가 돈을 댄 호화판 골프 여행이 폭로되자 이미지를 중시하는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 골프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9일 사기혐의로 5년 10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은 잭 아브라모프는 ‘로비계의 제왕’이라 불리며 공화당 실세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불법 로비를 펼쳐왔다. 2000년에는 딜레이 부부와 참모들을 영국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으로 초청, 7만 달러(약 7,000만원)의 비용을 지불했다. “일부는 자비로, 나머지는 후원금으로 충당했다”던 딜레이의 거짓말은 그의 정치 인생을 순식간에 고꾸라지게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삼일절 골프 파문으로 낙마한 한국 이해찬 총리를 빗대며 “일해야 할 시간에 골프를 즐겼다는 이유로 총리를 물러나게 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최근 일어난 로비 의혹으로 미국도 골프 스캔들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미국은 정치인의 골프에 너그러운 나라다. 골프채를 잡은 첫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를 필두로 존 F 케네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등 백악관의 주인들은 골프를 즐겼다. 1970년대 값싼 퍼블릭 골프장이 급속히 늘어나자 ‘엘리트 스포츠’라는 편견도 거의 사라져 골프는 친교와 로비의 장으로 자리잡았다.
골프 애호가였던 클린턴 대통령은 ‘멀리건(첫 샷을 잘못 쳤을 때 벌타 없이 다시 치게 해주는 것)’을 남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 ‘빌리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미국골프협회 회장을 두 명이나 배출한 골프 집안 출신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골프 중독 수준이다. 아들 부시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화씨 9/11’에서 “테러를 일으킨 살인자들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진지하게 방송인터뷰를 한 직후 “제 샷 좀 보시죠”라며 드라이버샷을 날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빈축을 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골프를 즐기고 있다.
골프와 정치의 관계를 설명한 책 ‘티샷을 날리는 대통령들’의 저자 돈 반 나타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아브라모프의 핵심 무기가 골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골프=타락한 정치’라는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신영 기자 dda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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