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여의도의 벚나무들 꽃눈이 텄다는 것이다. 하긴, 올해는 외려 늦은 편이다. 대개 이맘때 면 여의도에 벚꽃이 만개했고 남산 벚나무들도 눈이 시릴 만하게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며칠 전 밤, 친구와 친구의 개와 셋이서 경희궁 뜰을 거닐었다.
“굉장하지? 매화꽃향기좀봐!” 친구가 우뚝 멈추며 숨죽여 외쳤다. 내가 우둔하게 둘러보며“어디? 어디?” 중얼거리자 친구는 안타깝다는 듯“진동하잖아?” 속삭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떠오른 매화꽃 무리가 좀 선명해지도록 몇 걸음 다가가자 그제야 미세하게 떠도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후각만큼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진동한다는 향기를 이 정도 밖에 못 맡는구나. 내 감각의 둔함에 착잡해 하느라 매화꽃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때 본 매화꽃이 내 꽃 시간 감각을 헝클어뜨린 것 같다. 내게는 매화가 겨울 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방심하고 있었는데 벚꽃이라니! 벚꽃은내 본초자오선이다. 내게 한 해는 벚꽃의 계절과 그 밖의 계절로 나뉜다. 이제 날마다 남산에 가야지. 벚꽃이 떠오르고 지나가는 아찔한 시간을 지켜봐야지.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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