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리스로 도피성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적들에게 잡혔다. 몸값으로 20달란트(4,000명 이상의 군사를 모을 수 있는 거금)를 요구 받자 그는 “내 가치가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일갈, 스스로 50달란트로 올렸다. 이후 풀려난 그는 군사를 이끌고 가 그들을 몽땅 쓸어 버렸다.
그의 타고난 영웅적 기질을 나타내는 예로 자주 인용되는 일화지만, 한편으로는 해적이 인류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직업’임을 보여주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기야 산이고 마을이고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던 도적이 바다라고 예외였을 리는 없을 터이다.
▦ 이 바다도적들이 국가로부터 아예 허가증을 받아, 내놓고 노략질을 하던 때도 있었다. 카리브해와 대서양,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제국들 사이의 제해권 다툼이 한창 치열했던 17세기 후반부터 약 50년에 걸친 이른바 ‘해적의 황금시대’다. 심지어 경쟁국가 상선 등을 매우 잘 약탈했다고 해서 영국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해적도 있었다.
이 시기보다는 조금 앞서지만 에스파니아 무적함대를 격파, 트라팔가해전의 넬슨 제독과 더불어 영국해군의 양대 영웅으로 추앙받는 드레이크도 한때는 카리브해에서 보물선을 털던 인물이었다.
▦ 우리도 일찍부터 해적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일본해적 떼인 왜구(倭寇)가 그들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강대한 통일신라의 제왕 문무왕이 유언을 남기면서 다른 말은 제쳐두고 굳이 “죽어 호국용이 돼 왜적을 막겠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들의 규모와 행패가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훗날 동중국해를 석권한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나 고려 말의 이성계도 왜구를 소탕하면서 권력의 중심권에 진입했다. 특히 이성계가 용명을 날리던 고려 우왕 때는 아예 왜구들의 등쌀을 피해 개경 천도론까지 심각하게 제기됐을 정도였다.
▦ 우리 원양어선이 소말리아 근해에서 해적에 납치돼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최근 10년간 한국선박의 해적피해는 이번을 포함, 10건이나 된다. 대개 인도양에서 말라카해협을 거쳐 동중국해에 이르는 항로와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당했다.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국제해사국(IMB)이 수시로 ‘해적경보’를 발령하지만 그들의 기동력이 워낙 좋은 데다 중화기까지 갖춰 대응이 쉽지 않다. 퇴근길 가벼운 술안주로 오르는 참치회 한 점에도 우리 선원들의 목숨 건 노력이 배어 있음을 이 참에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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