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톱 소리가 요란하다. 작업실 옆 산에서 나무들이 쓰러진다. 불과 하루 만에 수십 년을 자란 나무들이 잘려나가 나동그라졌다. 그걸 망연히 바라본다. 이태 전 그 아래의 숲도 사라졌다. 앵초와 야생난이 지천으로 자라던 곳이다. 봄이면 몰래 찾아가 아껴가며 보던 꽃들이다. 숲속의 늪에 자리잡았던 앵초 군락지는 어느 날 그렇게 사라졌다.
오늘 나무들이 다시 쓰러진다. 산허리가 뭉텅이로 뜯겨져 나갔다. 수백 포기의 은방울꽃이 있는 비탈이다. 올 봄에는 그 작고 귀여운 흰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지난번 앵초밭이 뭉개질 때 남아 있는 꽃들을 날라왔다. 이번엔 은방울꽃을 가져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꽃이 피기도 전에 포클레인이 헤집고 있다. 벌써 뿌리를 감싸 쥔 소나무들이 도시로 팔려가기 위해 하나 둘 끌려나온다.
며칠 만에 쥐가 뜯어먹은 빵조각처럼 너덜해진 그곳은 보존림이다. 적어도 함부로 건들지는 말자고 약속을 했던 곳이다. 하지만 농림지건 보존림이건 수완 좋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구획을 해놓은 사람들도 더 이상 그곳에 관심이 없다. 개발의 논리를 능가하는 논리는 이 땅에 없다. 법과 행정적 절차를 앞세워 쳐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아낼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몇 번인가 어쭙잖은 항의를 해보다 곤욕을 치른 기억이 나를 움츠리게 한다.
누군가 그랬다. 그래도 싸워야 할 것 아니냐고. 환경단체와 연대를 하거나 지역주민과 힘을 합쳐 싸워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이미 알아버렸다. 시골에 살면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덕목이란 그런 일에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거기에 맞서 싸우려한다면 남은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나는 하고 싶지 않다. 한번쯤 목소리를 높이고 실랑이를 벌일 수는 있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비겁해져야 하는 이유이다.
처음부터 자연은 없었다. 자연이란 우리에게 언제든 개발과 도시가 되기 위해 남겨진 지역의 다른 말이다. 자연은 도시를 위해 유보된 공간일 뿐이다. 시골이나 자연은 우리에게 미개발의 열등한 공간일 뿐이다. 그런 사회에서 숲과 자연과 나무와 꽃을 말하는 일조차 우스운 일이다.
나무들이 쓰러진 곳에서 잘려나간 자작나무를 몇 토막 집어왔다. 목수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한 까닭이다. 누군가 숲을 훼손하면 혀를 끌끌 차다가도 거기에서 버려진 쓸모있는 나무를 찾아 들고 오는 추악한 짓을 해왔다.
오늘 나무가 다시 쓰러지는 걸 보면서, 은방울꽃 군락지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푸른 소나무들이 줄줄이 팔려나가는 걸 보면서 일어나는 자괴감을 견딜 수 없다. 도대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슬프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도시의 촉수에 여지없이 걸려들어 붉은 흙을 토해내는 숲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날들이 계속된다.
매번 봄은 오지만 매번 어제의 봄이 아니다.
김진송 목수ㆍ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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