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말 르네상스의 수도가 피렌체였다면 19세기말 태동하던 새로운 예술과 지성의 수도는 비엔나였다는 게 문화사학자인 칼 쇼르스케(미 프린스턴대 석좌교수)의 전언이다. 그의 역저 ‘세기말 비엔나’가 번역 출간됐다.
그의 주장처럼 세기말의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걸출한 예술가와 학자들, 그리고 그들이 지향했던 치열한 거역의 정신과 창조의 열정으로 위대했던 공간이었다.‘꿈’과 ‘자아’를 발견한 프로이트, 내면의 격정으로 세기말 미학을 완성한 화가 클림트와 에곤 쉴레, 표현주의의 코코슈카, 현대 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오토 버그너가 있었고, 음악의 토대인 조성마저 깨부순 혁명적 음악가 쇤베르크가 있었다. 그들이 구축한 정신이 그 유명한 ‘청년파’다.
호프만슈탈, 슈니츨러 등의 ‘젊은 빈’이고, 미술에서는 클림트 바그너의 ‘분리파’이고, 사상계로 눈을 옮기면 프로이트, 아들러, 비트겐슈타인 등의 ‘비엔나학파’다. 고전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도발적 결별의 정신.‘젊은 빈’의 중심 인물인 문예비평가 바르는 그의 유명한 자아 선언에서 “우리의 삶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환상이다. 그리고 나는 나이다”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왜 비엔나였을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세프는 수도의 방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환상(環狀)도로를 건설한다.
발흥한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그들의 힘을 과시한 30년 역사(1860~1890)의 ‘링슈트라세’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르네상스 고딕풍 건물들을 거느리며 뻗어나간 ‘링슈트라세’의 위세는, 하지만,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귀족과 황제 양 편으로 나뉘어 기대 섰던 이들 자유 부르주아지의 취약성으로 하여 1880년대 이후 그 빛을 잃는다. 세기말의 비엔나는 정치적으로 불안했다.
문화와 예술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구(舊) 체제의 모순과 불안, 허위의식을 뒤엎고자 하는 새로운 세기의 미학적 시도들이 폭발한다. 젊은 그들의 창조적 열정은 타 도시에 비해 여전히 번성했던 지식인들의 살롱 문화를 타고 예술의 전 분야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저자는 당시의 비엔나 지식 풍토가 가히 14세기 르네상스의 풍토를 방불케 했음을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한다.
책은 세기말 비엔나의 정치와 문화유산 등 포괄적인 배경, 시대정신이 구현된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구축해나간 건축가들의 현대적 사고, 프로이트의 세기적 저작 ‘꿈의 해석’,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던 클림트의 그림세계와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분리파’ 캐치프레이즈에 담긴 정신, 쇤베르크의 새로운 음악적 언어 등을 통해 20세기 문화가 구현해나간 ‘현대적 인간’의 목소리를 전한다.
책의 특징적 매력은, 그 개개의 전언보다 형식에 있다. 저자는 역사의 뿌리를 부정하는 모더니즘의 아집에 맞서, “무(無)역사적인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 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던 비엔나의 세기말을 복원한다.
그리고 다양한 문화 장르들이, 그들이 공유한 사회적 경험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규명한다. 책의 각 장은 스스로 완결적인 동시에 긴밀히 얽히고 기대며 세밀한 ‘세기말 비엔나’의 풍경을 완성한다.
역사가의 통시적 시선과 문화분석가의 공시적 분석을 조화한 이 연구저술 방식을 저자는 ‘포스트 홀링’(post-holingㆍ눈 쌓인 지역을 한 발 씩 푹푹 빠지며 전진하는 방식)이라 했고, 퓰리처상위원회는 1981년 그 노고와 업적에 논픽션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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