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영씨의 두 번째 소설집 ‘타잔’(실천문학사, 9,800원)은 쳇바퀴 속 우울한 일상과 그 굴레를 벗어나려는 안간힘에 관한 이야기로 굴러간다.
구르는 바퀴는, 그것이 제대로 구르는 한, 림(Rim)의 표면이 품고 도는 탱탱한 탈주의 욕구가 허브(Hub)로 모아 죄는 스포크(Spoke)의 구심력을 배반하지 못한다.
일상은 배반ㆍ탈주의 욕망과 체념ㆍ순응의 한숨 사이, 그 위태로운 긴장의 균형 위에 놓인다. 흔히 말하는 꿈이나 희망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관념의 비타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배반ㆍ탈주의 욕망이 곧 희망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바퀴는 뒤집어지고, 일상은 주저앉고 만다.
관념이 가르친 희망의 끝은 결코 분열이 아니었다. 그러니 탈주의 욕망에 성공하든 못하든 좌절의 메커니즘은 굳건하다. 이제 남겨진 것은 앙상한 단 하나의 물음밖에 없다. 균형으로 순응하고 긴장으로 안주(安走)할 것인가, 욕망으로 주저앉고 희망으로 좌절할 것인가.
“탄산수 10온스에 그레이프프루트 몇 쪽, 종합비타민과 항우울제, 진정제가 골고루 섞인 칵테일”을 ‘아침식사’로 마시는 ‘나’(‘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 “회사 식당 맨 왼쪽 창가 여덟번째 자리에서 먹고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의 각도조차 6년째 그대로”인 ‘그’(‘얼굴 없는 사나이’), “맨날 갑갑한 데 처박혀서 소 내장이나 주무르”지만 타잔처럼 나무타기만 하면 살 맛이 나는 ‘마장동 김씨’(‘타잔’)…. 8편의 단편을 이끄는 인물들이다.
‘세라’의 여자는 빚더미에 앉아있는 온 가족을 부양한다. 그녀의 직장이라는 것도 개발계획을 미끼로 아무에게나 전화해서는 부동산을 파는, 기획부동산 회사. 연말 세무조사를 앞둔 시점이다. 알 것 모를 것 다 아는 그녀에게 사장은 은근히 외유를 종용한다.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빚, 비루해져버린 애인…그리고 이렇게 산다는 것이, 모두 여자에게 견딜 수 없”(143쪽)어 떠난 태국여행.
그녀는 여행지에서 비슷한 또래의 또 한 여인 ‘세라’를 만난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리고, 의붓아비와 함께 자라며 어려서부터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는 법을 배”운 세라. 그녀는 서울행 오픈티켓을 지닌 채 기약 없이 여행지를 떠돈다.
“이 티켓은 내 탯줄이나 마찬가지야.…계속 가지고 다니다가 어딘가 정착했을 때, 더 이상 여한이 없을 때, 그 때 태워버릴 거야.…과거를 버리지 않으면 진짜 여행을 할 수 없어.”(137쪽) 우연히 세라의 여권가방을 맡아있던 차에 ‘쓰나미’가 닥친다. 세라는 숨지고, ‘그녀’는 살아 남는데, 이국의 의료진들은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를 ‘세라’로 오인한다. “바라던 대로 세상이 멈춰버렸고 돌아갈 집도 사라져버렸다.
이제 어수룩한 사람들에게 땅 장사나 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사채이자 걱정에 잠 못 이루지 않아도 되고, 정 떨어진 옛 애인도 더 이상 안 봐도 된다. 어쩌면…식구들은 거액의 보험금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세라의 여권과 신용카드를 챙긴 뒤 가방을 태워버린다. 한 걸음 한 걸음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세라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중얼거린다. “나는 자유에 지치지 않겠어.”(153쪽) 희망의 시효는, 그 아슬아슬한 해방과 자유의 바퀴가 얼마나 제대로 굴러갈 지 생각하지 않는 동안일 것이다.
단편집 속의 ‘그’와 ‘그녀’들이 쳇바퀴 같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은, 그들의 삶이 직면하는 우연찮은 우연과 흔치않은 인연들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들과 닮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의 뭉클함을, 우리는 위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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