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는 몸과의 관계에서다. 팔다리건 피부건 내부 장기건 있는 줄도 모르게 있어야 한다. 건강한 상태의 몸은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두개골 저쪽과 잇몸과 허파와 방광 등이 슬슬 번갈아 소식을 전한다. 그러면 낯설고 두려운 가운데 그 ‘있음’이 각성되는데, 어떤 때는 가령 ‘아, 바로 거기, 말피기소체’ 식으로 세세히 인식한다.
근래 존재를 드러낸 건 각막이다. 거울로 보면 잘 모르겠는데, 왠지 스타킹이 살짝 흘러내린 듯한 느낌이 ‘이것은 각막’이라고 끊임없이 속살거린다. 내 하소연을 들은 친구가, 현명한 친구였다면 안과에 가라고 했을 텐데, 이런 진단을 내렸다. “책을 지나치게 봐서 그래. 너, 책을 안 읽으면 못 견디겠니?” “아니, 지루해서 그래.” 대꾸하며 깜짝 놀랐다. 지루함을 느껴본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실은 무의식 속에서라도 지루했던 걸까? 지루함은 기운의 전령사다.
싱싱하고 건강할 땐 햇빛도 바람도 비도 음악소리도 몸을 투과하며 넘나든다. 계절도 나무도 사랑도 욕망도 그렇게 스며들고 흘러 넘쳐, 그 없는 느낌으로 몸을 느낀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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