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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Free가 만난 사람 - 70년대 전설적인 배우 이화시 그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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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Free가 만난 사람 - 70년대 전설적인 배우 이화시 그녀가 왔다

입력
2006.04.0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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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화 팬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던 70년대 전설적 여배우 이화시씨가 나타났다. 각종 영화제에서 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해 카리스마적인 눈빛 연기로 화제가 되었던 그는 10년 동안 아무도 행방을 몰랐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화시씨는 편안하고 따뜻한 눈빛의 멋진 중년이 되어있었다.

사이먼& 가펑클의 히트곡 ‘April come she will’처럼 4월 1일 비 내리던 만우절, 거짓말처럼 파란 우산을 쓴 수줍은 모습으로 그녀는 인터뷰를 위해 강남 도산공원에 나타났다.

“오랫동안 영화를 떠나 평범한 주부로 자녀교육에 전념하며 살았고 97년 카나다로 이민까지 떠났기에 전혀 이쪽 사정을 몰랐다. 최근 아는 분이 인터넷을 통해 저에 대한 소식을 알려줬다. 과분하게도 내가 7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로까지 화제가 된 사실을 최근에서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일로 잠시 귀국한 그녀에게 궁금했던 그녀의 영화인생이야기를 들었다.

이화시씨의 본명은 이경덕. 전남 영암초등학교 1학년 때 고향에 온 순회 영사반이 틀어주는 ‘느티나무 있는 언덕’이란 영화를 보고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시절 ‘페이 더너웨이 같이 생긴 여학생’으로 불리만큼 남학생들의 흠모대상이었다. 꿈은 1973년 단국대 국문과 3학년 때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되면서 이뤄졌다. 김감독은 예명을 이화시로 붙였다. 데뷔작은 중국4대기서 중의 하나인 ‘금병매’. “중국 4대 미인인 양귀비 왕소군 초선 서시 중 ‘서시’라는 여자는 찡그리는 것 까지 아름다웠던 경국지색의 미모였다”며 이름을 ‘꽃의 시작’이라는 화시로 정해주었다.

1998년 화제로 타계한 괴짜감독 고 김기영은 스타발굴의 귀재였다. 김지미를 비롯해 선우용녀, 윤여정, 임예진은 그가 발굴해 스타가 된 여배우들. 하지만 그에 의해 인정 받아 발탁되고도 이상하리만치 불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라진 비운의 여배우가 바로 이화시다. 데뷔 시절 ‘천사와 악마의 양 얼굴을 지닌 배우’, ‘차가운 껍질 속에 신비의 정열을 감춘 여자’등으로 메스컴의 촉각을 자극했었다.

차가운 지성미와 그 속에 감춰진 불 같은 정열을 동시에 뿜어내는 양면적인 캐릭터를 지닌 그는 너무도 개성이 강해 평범한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배우였다. 때론 요부 같은 섹스 어필한 대담한 연기까지 그는 ‘도금봉 이래 최고의 성격파 여배우’라 칭송 받을 만큼 독특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김기영감독도 생전에 그를 “숨겨놓은 진주”로 극찬했을 정도.

하지만 1996년 대학로 동숭시네마텍에서 열렸던 ‘한국의 명감독 회고전’이전까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중은 거의 없었다. 이때 포스터도 없이 상영된 김기영감독 영화 ‘반금련’과 ‘이어도’는 화제였다.

“원작을 훼손했다”, “원작을 능가하는 김기영식의 영화어법 해석”이라는 양극적인 평가 속에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친 주연 여배우 이화시의 이름 또한 젊은 영화팬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곧이어 96년 제1회 부산영화제에서 ‘이화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반금련’에서 이영애의 눈을 후벼 파는 악녀, ‘파계’에서는 사내의 품을 그리워하는 비구니, ‘이어도’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신과 정사를 벌이는 술집작부, ‘수녀’에서는 악랄하고 지독한 요부, ‘살인나비를 ?는 여자’에서는 남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귀신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섬뜩한 연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후 이화시가 누구냐?는 궁금증이 증폭되면서 단숨에 ‘베일에 가려진 70년대 전설적인 여배우’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 후 부산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이화시 찾기 작업이 시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몰랐고 개인 정보조차 전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주연한 대부분 영화는 상영금지를 당했고 개봉된 영화조차도 스크린쿼터를 염두에 둔 국책영화나 문예영화여서 개봉 1주일을 넘긴 영화가 전무했다. 당시 “얼굴이 퇴폐적이고 색기가 흐른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퇴출된 여배우”란 김기영감독의 언급은 신비함까지 더해졌다.

이씨는 ‘반금련’ 역을 맡아 명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국내 상영 금지’ 철퇴를 맞았다. 당시 게이영화로 화제가 되었던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개봉은 작품성 여부를 떠나 무조건 퇴폐적이란 이유로 가위질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상영금지조치는 당시 영화계에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상영금지냐?”며 술렁이게 했다. 소수의 영화인들만이 영화를 보았다.

충격적이고 대담한 영상과 더불어 주연 신인여배우 이화시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렬한 눈빛 연기는 단숨에 영화인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영화는 오랜 기간 지하창고에서 숨을 죽여야 했다. 7년 후인 81년 재개봉되었지만 120분이 넘었던 영화는 무려 40여隙?잘려나간 황당한 영화가 되었다.

데뷔작 ‘금병매’ 이후 영화계와 TV방송국에서 출연교섭이 밀려들었다. “그땐 너무 너무 흥분해서 잠도 설쳤어요. 바라고 바라던 배우가 돼서 일생의 전환기가 왔다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금병매의 상영금지조치로 모든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같은 해 임예진의 ‘파계’에 이어 1년 후 국책계몽영화 ‘혈육애’에 조연으로 출연을 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여타 국책영화처럼 극장을 얻지 못해 변두리 극장에서 잠깐 상영했을 뿐이다.

당시 ‘파계’와 ‘혈육애’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최불암씨는 “김기영감독님은 배우들에게 대본을 주지 않고 시퀀스만 던져주는 예측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를 제작했기에 조감독, 배우 할 것 없이 다 힘들어했다. 이화시씨는 스타가 되진 못했지만 그런 환경을 이겨낸 아주 개성이 강하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진짜 배우였다.

우리처럼 평범한 배우들은 사실 부담스런 면도 없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화역사를 뒤바꿀 70년대 영화계의 물건이었는데….”라고 회고했다. ‘반금련’과 ‘이어도’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박정자씨는 “개성이 강한 아주 좋은 배우였다.”고 이화시를 기억했다.

뒤늦게 부일영화제에서 ‘이어도’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실의에 빠져 한동안 시골에 내려가 잠적을 했다. 집안 식구보기도 민망했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부끄러웠다.

게다가 어느 새 영화계에선 김기영감독 전속배우로 이미지로 굳어져 감독들은 아예 그를 픽업할 생각조차하지 않았다. 그러다 78년 ‘살인나비를 ?는 여자’, 79년 ‘수녀’ 80년 ‘느미’, 82년 ‘화려한 경험’,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등에 조연 출연을 했다.

그때까지 받은 출연료는 편당 최하20만원에서 최고 50만원까지 모두 2백만 원 남짓. 6년 동안 10여 편에 주연한 대가치고는 그의 말대로 ‘버스타고 다니기도 벅차 걸어 다녀야’ 했을 만큼 가혹했다.

82년 결혼 후 은막에서 완전히 사라진 그녀는 87년 신인감독 백승에 의해 영화 ‘낮과 밤의 연가’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5년 만에 재기한 그녀를 기억한 일간스포츠에 인터뷰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이 영화도 평탄치 못했다. 제작에 문제가 생겨 30%정도 촬영하다 중단되었던 것.

결국 깊은 마음의 응어리가 생겼다. 원인도 모른 채 두통에 6개월 동안 혼수상태가 되었다. 이에 식구들은 광주의 유명한 무당을 불러 굿을 벌이기도 했다. 30대 중반의 일이다. 영화로 못 이룬 한의 응어리를 풀 기회가 왔다. 연극이었다. 88년 올림픽 열기가 후끈했던 그 해 예당소극장에서 “빨간 바다‘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에도 불우한 여자의 인생유전을 그린 현대판 심청전 같은 처절한 연극이었다. 대박이 터졌다. “연극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마음의 끼와 응어리를 다 풀어냈다. 한풀이가 되었다.” 이후 미련 없이 자연인으로 돌아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평범하게 살아왔다. 청춘극장 대표 안규찬씨는 “이화시는 한국 영화사에 다시는 찾아보기 힘든 강렬한 눈빛과 특별한 개성으로 연기했던 특별한 분이다. 모든 영화들이 개봉조차 제대로 되질 못했기에 정당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그래서 74년에 데뷔한 것이 아니라 96년에 비로소 데뷔한 이제 10년차 배우라고 생각한다. 꼭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녀의 등장에 흥분했다.

5일 캐나다로 돌아가면서 그는 “한때 김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해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 영화와 관련된 어떤 일이든 역할을 맡고 싶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뜻으로 생각한다.”며 “인터넷에서 저를 기억해주고 제 연기를 평가해주는 팬들에게 저에 대해 최소한 정보와 근황을 알려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며 인터뷰에 응한 마음을 전했다.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맞은 이장호감독은 “7월에 열리는 영화제에 김기영감독의 영화를 상영하고 이화시씨를 초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어쩌면 우리는 뜨거운 여름 날 부천에서 7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글. 사진=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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