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들의 울분·하소연 온종일 물밀듯
남자는 한참을 유리문 밖에서 머뭇거리다 들어왔다. 영세업체에서 돈 한푼 못 받으며 바보처럼 3년이나 일했다는 그는 꾹꾹 펜을 눌러 사장에 대한 고발장을 작성했다.
“회사가 도산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장 가족 명의로 아파트 몇 채가 있다는 거에요. 회사는 망했는데 사장은 떵떵거리고 사는 게 말이나 됩니까.”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서울지방노동청 남부지청 민원실. 냉수 한잔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킨 남자에게 상담원이 말했다. “억울하지만 사장에게선 한푼도 못 받을 것 같네요.” 현행법상으로는 사업주 가족의 재산까지 압류해 체불을 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담원은 체단금 제도를 알려줬다. 도산한 회사의 직원들에게 근로복지공단이 3개월치 월급과 3년치 퇴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남자의 흥분은 그제서야 잦아들었다.
노동사무소 민원실은 체불 해고 등 부당한 처우를 받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곳이다. 근로조건이 열악한 중소기업이나 영세업체 노동자가 많이 찾는다.
남부지청에서는 하루 평균 방문 50건에 전화 100건의 민원을 접수한다. 80% 이상이 체불 관련이다. 민원인 평균 월급은 120만원 안팎이다.
30대 초반의 재중동포 여성은 임금부당지급 진정서를 쓰다 대표자 성명을 적는 칸이 나오자 펜을 멈췄다. 고민 끝에 채워 넣은 것은 ‘김 사장님’. 이름도 모르는 사장 밑에서 3개월간 식당일을 하다 며칠 전 그만뒀다.
임신 5개월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 곳에 온 이유는 “너무 억울하고 괘씸해서”다. 떠나는 그에게 사장은 근무하지 않았지만 지급했던 설 연휴기간 일당을 3월 급여에서 빼겠다는 해괴한 계산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문을 나서는 그의 앙 다문 입술 사이로 “같은 민족끼리 해도 너무 한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노동사무소 민원실은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다. 억울하고 딱한 사연이 많다 보니 조용할 날이 없다. 민원인과의 멱살잡이는 상담원의 필수 과정이다. 깨져 나간 화분도 부지기수다.
법으로도 풀 수 없는 문제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상담원 최규정씨는 술에 취한 민원인에게 맞아 얼굴이 피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20대 후반의 남자는 사장의 꼼수에 말려 꼬박 3년을 일하고도 1원의 퇴직금도 못 받았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11개월을 일하고 1개월을 쉬는 식으로 3년을 근무했다.
사장이 같은 직장에서 1년 이상을 계속 일해야 퇴직금을 준다는 법 규정을 악용한 것이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상담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 색깔을 되찾았다. 지속적으로 1년 이상 일한 것으로 판단 가능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이 곳을 찾는 민원인은 대략 50명 정도. 고령자 취업이 늘면서 머리 희끗희끗한 민원인이 부쩍 많아졌다. 장날은 비오는 날이다. 비 때문에 일거리가 없는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이 예전에 못 받은 임금을 받으러 몰려 오기 때문이다.
사장 이름 석자만 대고 돈 받아달라고 우길 때가 가장 난감하다. 그래도 노동사무소는 노동자의 사랑방이고 싶다.
박종선 남부지청장은 “누구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을 땐 언제라도 환영한다. 다 해결해 줄 순 없겠지만 노동자들의 불만과 고민은 언젠가 정책과 법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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