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은행 인질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인질들이 얼마나 큰 고생을 했겠는가. 강도들을 증오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인질들은 그 상황에서의 강자인 강도들의 논리에 동화되어 그들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사랑하는 행태마저 보였다. 이를 가리켜 ‘스톡홀름 신드롬’이라 한다.
이 용어의 활용범위는 넓다. 그러다보니 성매매특별법에 반대하는 성매매 여성과 황우석 박사의 열성 지지자들에게 이 딱지를 붙인 이들도 있었다. 논란의 소지가 큰 용법이다. 한국 정당과 유권자의 관계를 ‘스톡홀름 신드롬’의 관점에서 보는 건 어떨까?
●불신하다가도 투표땐 정당에 집착
한국인의 정당 충실도는 대단히 높다. 아니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사람이 다수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투표시에 그렇다는 것이다. 평소엔 지지하는 정당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당들에 침을 뱉다가도 투표를 할 때엔 정당만 보는 게 한국 유권자들의 속성이다.
왜 그럴까? 한국인들은 정당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정당을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더욱 정당에 집착한다. 정당이 공명정대한 집단이라면 굳이 정당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정당은 불공정과 편파에 능한 집단이기에 지역발전을 위해선 힘이 있는 정당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유권자들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통찰이다.
좀 점잖게 이야기하자면, 유권자들에겐 정당정치에 대한 신념보다는 정당 중심의 정략적 파워에 대한 기대(또는 공포) 심리가 강하다는 뜻이다. 지역주의적 투표 행위도 궁극적으론 ‘우리 지역 정당’을 키우자는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는 게 옳다.
동기야 어찌됐건 유권자들의 높은 정당 충실도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 할 정당정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게 아닌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정당들은 바로 그 점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유권자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습게 본다.
1960년 이후 2005년까지 생겨난 정당은 모두 109개로 정당 1개당 평균 수명이 2년 9개월에 불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권자들은 정당을 지지한다기보다는 불공정과 편파를 자행할 힘이 있는 집단에 표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힘 있는 몇몇 정치인만 움직이면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정당이다.
2003년 11월에 생겨난 열린우리당은 ‘100년 정당’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힘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 관계가 어찌 될 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언론은 5ㆍ31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이 ‘승리 지상주의’에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다 구구절절 옳은 비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당은 바보가 아니다. 언론의 비판을 받을수록 표를 얻는 데엔 더 유리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권자는 뭔가. 정당의 인질이나 포로라는 뜻이 아닌가.
유권자들은 거대 정당들의 파워를 잘 알고 있기에 거대 정당 이외의 정당 후보들에겐 웬만해선 표를 주지 않는다. 민주주의 원칙과 지역 이기주의 사이에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교과서적 명분이 동원된다. 다당제는 정국 혼란을 가져온다거나 무소속의 난립은 책임정치를 어렵게 한다는 등의 이론으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결국 유권자는 정당의 포로 신세
일리 있는 이론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권자들이 스스로 거대 정당의 과오를 교정하거나 응징할 수 있는 힘을 포기한다는 데에 있다. 겨우 ‘덜 괘씸한’ 양대 정당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론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나면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받는 정당은 “위대한 민심에 감사드린다”고 노래할 게 틀림없다. 그게 바로 ‘스톡홀름 신드롬’의 주제가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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