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뜻 사이의 연분은 제멋대로다. 중세 한국인들이‘셕’이나 ‘혁’이라고 불렀던 물건을 현대 한국인들은 ‘고삐’라고 부른다. 이런 변덕스러움을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그 자의성의 너울에도 더러 구멍이 뚫려있다. 말하자면 어떤 소리들이 제 몸뚱어리에 새겨놓은 의미의 무늬들은 사뭇 인상적인 일관성을 띠기도 한다. 이렇게 의미적으로 가지런한 문신(文身)은 소리가 그 자체로서 자의성 너머에 튼튼히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상징이랄 수 있다.
예컨대 ‘ㄱ’ 소리가 단단함의 상징을 지녔다면 ‘ㄹ’ 소리는 무름의 상징을 지녔다. ‘죽다’와 ‘살다’에서 그 단단함과 무름의 맞섬이 또렷하다. ‘ㄱ’이 죽음의 소리라면, ‘ㄹ’은 삶의 소리다. ‘ㄹ’은 ‘ㄱ’하고만이 아니라 ‘ㄷ’하고도 맞선다. ‘ㄷ’이 닫힘의 소리라면, ‘ㄹ’은 열림의 소리다. ‘닫다’와 ‘열다’에서 이미 그 두 소리는 표나게 대립한다. 살아있다는 것, 열려있다는 것은 흐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ㄹ’은 액체성의 자음이다. 그 액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동사 ‘흐르다’에 이미 이 ‘ㄹ’이 흐르고 있다.
‘ㄹ’은 흐른다. 술이 철철 흐르고 물이 졸졸 흐르듯. 스르르, 사르르, 까르르, 조르르, 함치르르, 찌르르, 번지르르, 반드르르, 야드르르, 보그르르, 가르르르, 와르르, 후루루 같은 의성어 의태어에서 ‘ㄹ’은 미끄러지며 흐른다. 물처럼, 술처럼 흐른다. 그것은 더러 데굴데굴, 데구루루 구르기도 한다. 그렇게, ‘ㄹ’은 흐르면서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면서 구른다. 말하자면 ‘ㄹ’은 움직인다. 나풀나풀, 한들한들 움직인다. ‘ㄹ’은 꿈틀거리고 까불거리며 넘실거리고 재잘거린다. 그것은 날거나 놀거나 거닐거나 부풀어오른다.
고려속요 ‘청산별곡’은 ‘ㄹ’을 타고 흐른다. 첫 두 연에서 이미 이 노래는 ‘ㄹ’의 향연이다. ‘청산별곡’은 흐르고 구르고 미끄러진다. 그 가멸진 ‘ㄹ’ 소리의 생기발랄에 정신을 팔다보면 이 노래의 심란한 정조(情調)마저 잊기 십상이다. 그러나 ‘청산별곡’은 슬픈 노래다. 화자가 “청산애 살어리랏다”라거나 “바라래 살어리랏다”라고 노래할 때, 그 푸른 산과 바다는 그가 정녕 살고 싶은 곳이 아니다. 멀위(머루)와 다래와 나마자기(나문재)와 구조개(굴조개)로 연명하는 삶을 그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 같지는 않다. 청산과 바다에서의 그 구차한 삶은 자발적 청빈이 아니라 강요된 한소(寒素)다.
물론 우리는 ‘청산별곡’의 둘레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도, 작자의 이름은커녕 그의 신분이나 처지도 정확히 모른다. 우리가 작자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가 유복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리라는 것 정도다. 게다가 조선조 16세기(‘악장가사’)에 들어서야 채록된 고려 시대 언어를 남김없이 해독하지도 못한다.
이런 문헌학적 빈곤에 따른 의미의 혼란은 이 노래가 과연 온전한 하나의 노래인가, 혹시 두 개 이상의 노래가 후세에 합쳐진 것은 아닌가, 연들이 뒤바뀌었거나 채록 과정에서 빠뜨린 사설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첫 연의 ‘청산’만 해도, 그것을 이 노래의 화자가 꿈꾸는 이상향으로 읽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전(現傳)하는 상태가 본디의 온전한 형태라 치고 이 노래를 조심스럽게 읽어나가면, ‘청산’은 화자가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곳이다.
‘청산별곡’은 패배자의 노래다. 화자는 외롭고 시름겹다. 그는 이럭저럭 낮을 지내왔지만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 지낼까 걱정하는 주변인이다. 그는 외로움과 시름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는 유약한 인간, 눈물의 인간이다. 시름겨운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그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우는 것뿐이다.
그가 외롭고 시름겨운 것은 삶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이다. 난리를 피해 청산으로 왔든 아니면 강제로 그 곳에 옮겨졌든, 그는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끼 묻은 쟁기를 보며, 고향에서 제가 갈던 사래(밭이랑)를 그리워한다. 그는 당하고만 살아온 인간이다. 어디다 던지던 돌이냐, 누구를 맞히려던 돌이냐는 그의 물음은 저항이나 분노의 목소리에 실려있지 않다. 그는 이내, 미운 이도 고운 이도 없고 그저 맞아서 울 뿐이라며 징징거린다.
그는 자신을 밀쳐낸 인간을 미워할 줄도 모르는 숙명주의자다. 이 떠돌이 빙충이가 할 줄 아는 것은 우는 것뿐이고, 그가 기대는 것은 술뿐이다. 그래서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라는 후렴구는 두드러지게 얄궂다. ‘ㄹ’ 소리로 미끄러져 흐르는 후렴구의 경쾌함 탓에 화자의 서글픔은 순식간에 묽어진다. 이 노래에서, 무거움은 가벼움 위에 얹혀있다.
후렴구의 경쾌함은 ‘ㄹ’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얄랑셩’의 ‘ㅇ’ 받침소리에서도 온다. ‘ㅇ’은 가벼움과 말랑말랑함의 소리, 탄력의 소리다. ‘ㅇ’은 공(球)의 자음이고 동그라미의 자음이다. ‘ㅇ’ 소리는 또랑또랑하고 오동포동하고 낭창낭창하다. 그것은 음절의 끝머리에 대롱대롱, 주렁주렁, 송이송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아장아장 걷거나 붕붕거리거나 빙빙 돈다. 어화둥둥, 아롱아롱, 퐁당퐁당, 송송, 상냥하다, 싱싱하다, 강낭콩 같은 말들은 ‘ㅇ’ 소리의 가벼움과 울림을, 그 원만함과 구성(球性)을 뽐낸다. 엉덩이와 궁둥이에서도 ‘ㅇ’ 소리는 통통하고 말랑말랑하고 경쾌하다. 고유어에서만이 아니라 영롱하다, 낭랑하다, 생생하다 같은 한자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이미 빙글빙글이나 말랑말랑 같은 말이 나왔지만, ‘ㅇ’과 ‘ㄹ’이 동거하면 그 말에선 탄력과 흐름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슬렁어슬렁, 방실방실, 싱글싱글, 빙글빙글, 벙글벙글, 달캉달캉, 팔랑팔랑, 찰랑찰랑, 펄렁펄렁, 종알종알, 설렁설렁, 옹알옹알, 알쏭달쏭, 뱅그르르, 날쌍하다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청산별곡’의 후렴구 “얄리얄리 얄랑셩”도 한가지다. 그것은 유체성과 탄성(彈性)을 동시에 지녔다. 한마디로 그것은 몰캉몰캉하다. ‘청산별곡’의 받침대에서는 둥글둥글한 것이 뒹굴고 있다.
‘청산별곡’에서, ‘ㅇ’ 소리가 후렴구만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연의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나 4연의 “이링공 뎌링공 하야” 같은 구절의 ‘ㅇ’ 받침도 이 노래의 소리세계에 탄성을 베푼다.
그렇다고는 하나, ‘청산별곡’의 소리상징이 탄성보다는 유체성에 훨씬 더 크게 기대고 있는 것은 또렷하다. 다시 말해 이 노래에선 ‘ㄹ’이 ‘ㅇ’을 이긴다. 그래서 ‘청산별곡’은 튀어 오른다기보다 흐른다. 동요로 만들어져 잘 알려진 권오순(1919~1995)의 동시 ‘구슬비’ 첫 연은 ‘청산별곡’처럼 ‘ㅇ’ 소리와 ‘ㄹ’ 소리를 섞어 밝음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청산별곡’과 달리 ‘구슬비’의 소리 배합에서는 탄성이 유체성을 이기는 것 같다. 다시 말해 ‘ㅇ’이 ‘ㄹ’을 이기는 것 같다.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그래서 이 노래는 흐른다기보다 튀어 오른다.
현전하는 여요(麗謠)가 대체로 그렇듯, ‘청산별곡’이 이미지의 직조에서 독자를 탄복시키는 바는 별로 없다. 그러나 ‘ㄹ’ 과 ‘ㅇ’을 섞어 소리들의 탄력적 흐름을 인상적으로 짜냄으로써, 이 노래는 한국어의 도드라진 미적 표본 하나가 되었다.
▲ 청산별곡(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숀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貧??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사미 짐ㅅ대예 올아셔
해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매와
잡사와니 내 엇디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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