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작가 장 필립 뚜생의 소설이 간만에 나왔다. ‘사랑하기’(현대문학, 이재룡 옮김ㆍ8,000원). 지난 해 그의 신작 ‘도망치기’가 실험적인 작품에 주는 프랑스의 ‘메디치상’을 타면서 그의 2002년 작품이 이제 번역돼 나온 것이다.
기왕의 그의 소설들-욕조, 사진기, 텔레비전 등-이 소설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서로의 취향을 탐색하고 아울러 그 수준까지 은연중에 견주는 지침처럼 거론되긴 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대체로 미적지근했던 듯하다.
대충 감이 잡히겠지만, 그는 전통적인 소설 독자의 입맛에 충실하지는 않다. 그는 대개 짧은 이야기 한 토막을 끊어 그 속의 사소하고 지엽적인 묘사들로 경장편 한 편을 채우고, 그 스타일로 하여 ‘미니멀리즘 미학의 새로운 경지’라는 멋진 감각의 영지를 확보하고 있다.
이번 소설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7년간의 연애 끝에 이별의 국면을 맞이한 남녀. ‘나’는 의상디자이너인 여자친구 ‘마리’를 따라 행사가 예정된 일본 도쿄로 여행을 온다.
소설은 1인칭 화자의 화법으로, 이미 시들해진 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찾아 드는 폭력적인 욕망, 갈등과 권태와 기진의 순간들과 그 느낌들을 촘촘한 묘사로 이어간다. “자신을 잊기 위한 고독한 쾌락을 통해 슬픔을 내 몸에 마찰시켰다.…포옹이 길어지고 성적 쾌락이 신물처럼 목구멍으로 역류할 때면 이 포옹에 잠재된 끔찍한 폭력성이 느껴졌다.”(30~31쪽)
소설은 “나는…여차하면 어떤 놈의 면상에다 뿌릴 생각으로 염산병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이 유리병을 수중에 품은 뒤부터 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나’는 그 염산을 달빛 아래 창백한 꽃에 부어버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무한히 작은 재앙의 근원이 나였다는 느낌을 빼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뚜생의 언어가 직조한 존재의 욕망과 허무의 무늬는 매직아이의 문양처럼 몽환적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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