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5월13일, 일본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 폴로 셔츠 차림의 40대 소설가가 ‘제국주의 관료 보급소 동경대 해체’를 외치며 학내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이 학교 ‘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전공투) 학생들과의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느긋한 표정으로 강의실에 들어선다.
교실 입구에는 이 작가의 별명인 ‘근대 고릴라’의 캐리커처와 ‘고릴라 사육료 100엔 이상’이라고 쓰인 토론 안내문이 붙어있다. 자신을 풍자하는 안내판을 보고 지그시 웃는 이 작가를 따라 많은 학생들이 함께 웃고 있다.
공산당마저 기성체제로 몰아붙이며 각목을 휘둘러댄 이 난폭한 극좌 학생들의 초청을 받은 이는 일본 군국주의를 목청 높여 외친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가면의 고백’ ‘금각사’ 등 탐미주의 소설로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에 올랐던 그가 일본의 재무장을 호소하며 자위대 본부를 점거, 전통 사무라이 방식으로 할복 자살해 전 세계에 충격을 몰고 오기 딱 한 해 전의 일이다.
미시마와 1,000여명의 전공투 학생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벌인 이 토론회를 지상중계하는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 1969~2000’는 토론회 녹취록과 참여자들의 토론 후기를 묶어 69년 발행된 책을 1부에, 토론 30주년을 기념해 전공투 토론자들이 99년 개최한 토론 내용을 2부에 나눠 담았다.
‘일본의 근대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벌어진 이날 토론회에선 자연과 인간, 시간과 공간, 사물과 말, 문학과 정치, 천황의 신격과 인격 등 방대한 주제들이 논의됐고, 그것은 30년후 전공투의 평가처럼 “근대를 둘러싼 전율할 정도로 중후하고 약동감 넘치는 토의”였다.
그러나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40대 극우 소설가와 20대 극좌 학생들이 벌인 토론의 내용보다는 그들이 서로에 대해 보인 예의 있는 조롱과 우아한 비아냥 때문이다. 언뜻 불구대천 원수들의 ‘잘못된 만남’처럼 보이지만, 이날의 토론은 저질스런 공방과 비난으로 일관하는 우리의 이념 풍토를 떠올려보면 묘한 질투마저 느껴질 정도로 격조있는 유머와 우호적인 농담 속에서 진행됐다.
이들이 “냉소든 조소든 적어도 사람은 웃으면서 싸우지는 못한다”는 미시마의 토론 후기처럼 서로에 대한 존중과 격려로 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가 자민당과 공산당이라는‘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마와 전공투 모두 살육으로 점철된 제국주의와 유사 민주주의를 배태한 근대를 넘어서려는‘근대 초극’의 의지를 가진‘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한 때 교차로에서의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운명은 종내 엇갈렸다. 그들 모두 ‘거짓 근대’의 전복을 꿈꿨지만, 미시마에겐 신적 존재로서의 천황이, 전공투에겐 혁명의 해방구가 그 방법론이었다.
“제군들이 천황이란 말을 한마디만 했어도 나는 기꺼이 (전공투 투쟁에) 동참했을 것”이라는 미시마에게 천황을 비판하며‘천황’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전공투가 “그래서 공투(공동투쟁)할 겁니까, 말 겁니까?”라고 물을 정도로 이들의 접점은 가까워졌다. 그러나 미시마는 “다른 것은 믿지 않아도 제군들의 열정만은 믿는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아주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투를 거부합니다”라고 답한다. 극우와 극좌의 연대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교실에서는 큰 웃음과 박수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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