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는 30일 30년이 지난 1960~70년대 외교문서 1,206건 11만 7,000여쪽을 공개했다. 공개문서에는 동백림사건, 요도호 납치사건, 무기구매와 군사원조를 둘러싼 한미간의 미묘한 긴장관계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 동백림 사건
獨정부, 차관제공 연기 등 석방 압력
67년 6월 작곡가 고 윤이상씨를 비롯한 재독 예술가, 유학생, 교민 등 194명이 간첩혐의로 고초를 겪었던 동백림 사건 문서들이 공개됐다. 특히 간첩으로 지목된 교민과 유학생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로 한국으로 송환됐던 구체적 정황들이 대사관과 외무부를 오간 문건들로 생생하게 확인돼 눈길을 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유럽 각국의 대사들에게 중정파견관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문건도 있고 중정파견관이 독일정부가 납치와 관련해 항의하는 내용을 보고한 전문도 있다.
중정파견관 등이 보고한 전문 등에 따르면 당시 동백림 사건이 터진 뒤 유럽의 여론은 최악이었다. 주독대사관은 당시 전문에서 ‘68년 독일 시위대가 사건에 항의, 태극기에 나치스 표식을 붙이고, 주독대사관에 난입해 기물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독일정부가 68년 3월 한국 검찰이 동백림 사건 관련자에게 중형을 구형한 데 항의해 예정됐던 영남화력발전 차관협정 서명식을 미뤘다는 내용도 있다. 이듬해 1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특사를 서울로 보내 윤이상씨 등 6명을 71년까지 석방한다는 합의를 받아냈다는 내용의 문건도 있다.
● 요도호 사건
北, 피랍기·승무원 신속 송환…사의 표시한 日에 정부 항의
70년 3월 일본 적군파 요원들의 일본항공(JAL) 비행기 납치 사건인 요도호 사건 문서에는 한일 양국 정부가 벌였던 팽팽한 신경전을 볼 수 있다. 당시 김포공항에 내렸던 비행기는 인질 대신 일본 운수성 차관을 싣고 79시간만에 평양으로 떠났고 이후 북한은 납치범을 제외한 승무원과 비행기를 돌려보냈다.
이와 관련 일본은 북한의 조치에 사의를 표시했지만 정부는 일본측에 수 차례 항의했다. 당시 정부의 평가문서에는 “북괴의 조기석방으로 인해 북괴의 인도주의 찬양과 (일본의 대북) 부채감을 주게 된다”며 북일간 화해무드를 경계하는 분석도 있다.
● 한미관계
佛미사일·英잠수함 사려 하자…美 "정치문제 야기할 것" 으름장
정부가 70년대 중반 미국이 아닌 제3국에서 무기를 구매하려 하자 미국이 강하게 견제한 정황을 담은 문건도 있다. 75년 1월 프랑스 미사일과 영국 잠수함 도입문제와 관련, 주미대사관 공사가 미 국방부 부차관보를 면담한 보고서에서다. 당시 아브라모비츠 부차관보는 “한국이 프랑스 미사일을 구매하면 무상군사원조와 관련해 미 행정부는 의회의 압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잠수함 구입을 미측과 사전협의 없이 결정하는 것 역시 정치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부가 68년 이후 더 많은 군사원조를 받기 위해 미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파상적인 로비에 나서자 미국측이 정식으로 중지를 요청하는 내용의 문건도 있다. 70년 3월의 한 문건에선 포라 주한 미대사가 최규하 외무장관을 만나 “국무성 입장에서 외국 정부가 미국 의회에 접촉해 로비활동을 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며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 바란다”고 강한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또 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한 안보회의에 제출된 외무부 보고서에는 미 하원에서 제기됐던 미 2사단의 서울 이남 이전문제와 전쟁 발발시 미국 본토의 미군 증원문제를 놓고 우리 정부가 크게 우려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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